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여성 해방을 외치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06-05 10:58     조회 : 419    
   https://inews.ewha.ac.kr/news/articleView.html?idxno=31931 (168)
이대학보  1599호  2020년 6월 1일 월요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여성 해방을 외치다
‘이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초와 최고의 역사’

본교는 수많은 여성 지식인을 배출했고, 이들은 ‘이화인’으로 한데 묶였다. 본지는 이화인의 업적을 발굴하고 그의 생애를 회고하는 ‘최초의 이화 최고의 이화’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고(故) 이태영 박사(1914~1998) (가사과·36년 졸)를 조명한다.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오백 년 묵은 인간 차별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으니

축하한다고 말해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1989년 제3차 가족법 개정 이후 이태영 박사의 소감 中

‘여성 최초’ 서울대 법대 입학,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 국내 ‘여성 최초’란 타이틀을 가진 인물, 바로 故(고) 이태영 박사(1914~1998)(가사과·36년 졸)다. 이태영 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돼 있다. 그는 호주제 폐지와 동성동본금혼령 폐지, 가정법원 설립을 이끈 가족법 개정의 선구자다. 본지는 5월25일 이태영 박사의 아들인 정대철 前(전) 민주당 대표와 손자인 재단 법인 정일형·이태영박사기념사업회 정호준 이사장을 봉원동 기념관에서 만나 이태영 박사를 회고했다.

“조모께서는 부조리한 일에 따지고 싸우는 저항적 기질을 지니셨죠. 생전에 ‘파도와 같은 요구가 밀려와 거기에 포로가 됐다’고 말씀하셨어요. 일제강점기 시절엔 독립운동가 남편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고, 광복 후엔 여성 인권 신장에 몰두하셨어요. 독재 정권 시절엔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적극 뛰어드셨죠.” 정 이사장의 기억 속 이태영 박사는 일평생을 사회 변혁 운동에 바친 인물이었다.



일찍이 가족법 개정의 불씨를 품었던 법학도 이태영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던 아이는 훗날 여성 인권 신장에 앞장선 인물이 됐다. 이태영 박사는 1914년 평안북도 운산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금광일을 하며 독립 운동 자금을 후원하는 애국자였으며, 어머니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외치던 선진적인 어른이었다. 그의 큰 오빠 역시 변호사나 국회의원이 되면 좋겠다고 그를 격려하곤 했다.
“당시 외조모(이 태영 박사의 어머니)께서는 이웃을 돕고 소외된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분이셨어요. 여성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철학도 갖고 계셨죠. 이 영향으로 제 어머니께서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전)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가 꿈과 개척정신, 개혁 정신이 있었기에 전문학교에 진학한 거였죠.” 정 前 대표가 설명했다.

이화에 온 이태영 박사는 언제나 한 손엔 가사과 책 보따리를, 다른 한 손엔 법률학 책 보따리를 들고 다녔다. 가정과 사회를 공부해 여성의 지위를 높이겠다는 꿈, 법률을 공부해 차별받는 여성을 돕겠다는 꿈. 이 두 가지 꿈을 담은 보따리였다. <실용과학>을 공부하며 불평등한 사회 제도를 알게 됐다. 전국 웅변대회에선 여성 해방을 외치기도 했다. 1등을 수상한 1935년 조선중앙일보사 주최 전국여자 전문학생 웅변대회에서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가 제1의 인형이라면 제2의 인형은 한국 여성”이라고 연설했다. 한국 여성이 가정만 지키는 인형의 집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그의 마음속엔 일찍이 가족법 개정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법률 공부를 위해 연희전문학교 정광현 교수에게 특별 과외도 받았다. 당시 이화여전엔 법학과가 없었고, 남녀 공학대학 법학과엔 여성이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정 넘치던 이태영 박사는 1936년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 졸업했다. 이후 항일운동을 하던 故 정일형 박사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투옥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당시 슬하의 세 자녀를 홀로 키웠다. 한 평짜리 셋방을 얻어 손수 가위질을 하며 이불 누비며 장사했다. 정 前 대표는 “당시 어머니가 오랜 기간 힘들게 가위질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오른손 검지는 거의 ㄱ자로 휘었다”고 회상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서울대 법대에 학사 편입하며 32세의 법학 만학도가 된 이태영 박사. 법조인으로서의 성공 뒤에는 남편 정일형 박사의 헌신적인 지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회고할 때 ‘이태영이 정일형을 위해 고생한 게 혼인 이후 9년이었다면, 해방 이후 37년은 정일형이 이태영을 위해 살아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고등고시(사법시험)를 준비하는 어머니를 적극 응원했어요. 여성 단체가 주는 ‘외조상’을 받을 정도였죠.”

법대 시절부터 변호사 시절까지 바빴지만, 그는 일과 가정 모두를 사랑했다. 손자 정 이사장이 추억하는 이태영 박사는 ‘바쁜 와중에도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밖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 집안에선 언제나 가족의 행복을 비는 자상한 조모였다.



여성 운동의 횃불을 들었던 변호사 이태영

법대를 수료한 후 이태영 박사는 법관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故 이승만 前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여성 법관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반대했고, 결국 이태영 박사는 195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 사무실 개업 후 1956년엔 여성법률상담소(현 가정법률상담소)를 개소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성들이 매일같이 사무실 앞에 길게 줄 서곤 했다. 비슷한 시기 가족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가족법은 민법 중 「친족상속편」을 일컫는다. 이태영 박사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범여성 운동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당시 여성 지도자 몇 분과 故 김병로 前 대법원장을 찾아갔어요. ‘친족상속법개정에 관한 진정서’를 전달하고 취지를 설명했죠. 그러나 돌아온 답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법을 한 자도 못 고친다’는 호통이었습니다.” 이태영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여성단체와 분담해 법제처장, 법무장관 등을 두루 찾아다녔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정도로 그에게 있어 가족법 개정은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핵심이었다.

그의 기독교적 신앙심과 정의감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생전 국가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일과, 소외 계층과 더불어 사는 일에 대한 소명을 말씀하셨어요. 또 민주화를 통해 여권 신장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셨습니다.” 정 前 대표는 이태영 박사가 독재정권 당시 평화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위해 힘쓴 순간을 회상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의 선거유세에 동참했다. 그는 이 선거가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비록 선거에 실패하고 이듬해 1972년 유신이 선포됐지만, 어머니의 민주화 운동은 계속됐어요. 1976년에는 김대중, 윤보선 前 대통령, 남편 정일형 박사 등과 함께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셨죠. 이 사건으로 3년간 변호사 직책을 박탈당했어요.” 이 선언은 유신체제 해제를 요구한 반정부선언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이태영 박사는 스스로 정치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정치 하려고 가는 게 아니오. 기존 남성 정치인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여성이 깨우쳐서 그 위력을 남성에게 보여줘야 하기에 교단을 떠난 것이오.” 1971년 선거유세 동참을 위해 본교 법학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며 그가 남긴 말이다. 그는 김대중 前 대통령으로부터 제안받은 비례대표제 국회의원 자리도 거절했다. 민주화 운동의 초점이 흐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태영 박사는 여성 해방 및 민주화 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상 사회지도부문을 받았다. 그 외에도 유네스코 인권 교육상(1982), 세계감리교 평화상(1984), 국민훈장 무궁화장(1990), 제 1회 ‘자랑스러운 이화인’ 상(1995) 등을 수상했다. 2002년 4월에는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 여권 신장 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2017년엔 세계 여성을 날을 맞아 구글이 선정한 주목할 만한 여성 13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본교 윤후정 명예총장, 故 이희호 여사 등 후배 여성 지도자 양성에 애썼다. 그들에게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자는 용기를 심어줬다. “조모께서는 여성 지도자들의 ‘아이콘’과 같았어요. 여성 지식인으로서 횃불을 들고 먼저 나가 후배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신 것 같아요.” 정 이사장이 전했다.



한평생 불꽃으로 기억될 이화인 이태영

정 前 대표는 이태영 박사가 생전 본교에 대한 애정이 짙었다며 그를 추억했다. “어머니께 이화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평소 ‘아아 우리 이화’가 들어간 교가를 많이 부르셨어요. 아직 제가 외우고 있을 정도지요.”

그는 39년간 소장으로 있었던 한국가정법률상담소(법률상담소) 경영권을 본교에 승계했다.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로 시작한 법률상담소는 이태영 박사가 사랑하고 아끼던 기관이었다고 정 前 대표는 말했다.

본교 강단에선 이화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정 이사장은 이태영 박사가 1965년 본교 강단에서 남긴 말을 전했다. “시집 잘 가려고 이대에 왔으면 당장 학교를 그만둬라. 남자 대학생의 5분의 1도 안되는 여자 대학생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책임이 있다. 특히 여성 법학도는 남녀 차별의 굴레에서 억압받는 여성을 위해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한다.”

한편 재단법인 정일형·이태영박사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는 이태영 박사와 남편 정일형 박사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1989년 설립됐다. 정 이사장은 “두 분의 업적과 뜻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장학사업, 정일형·이태영 자유민주상 시상, 강연회 개최 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념사업회의 노력이 더해져 2019년에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이태영 박사가 실렸다.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 130~131쪽에는 ‘인권변호사 이태영’이란 제목으로 그의 생애가 기록돼있다. 정 이사장은 “이제 많은 학생들이 인권변호사로서 조모님의 생애를 기억하게 됐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태영 박사가 생전 거주한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생가는 정일형·이태영 박사 기념관으로 남았다. 기념관에는 그가 사용한 생활 집기, 가구 등과 상패가 전시돼있다. 또 이태영 박사가 약 20년간 집필한 한국 여성 운동사 원고 메모 일부도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태영 박사의 생애를 이어 이화인들이 세상을 바꾸길 기대했다. “이화여대 후배들이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선배인 이태영 박사님의 결단과 노력, 담대함을 본받아 세상의 부조리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출처 : 이대학보(http://inews.ewha.ac.kr)
인물팀 강지수 기자, 권경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