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정치인사이드] 이태영의 시간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08-13 15:49     조회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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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정치인사이드] 이태영의 시간
신지예 젠더폴리틱스 연구소장

 여성 최초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태영 박사
 평생 여성 위한 법률 지원과
 남성 중심 법 개정 운동 펼쳐
 아동 성착취한 손정우 결혼 취소 소식보다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가 더 뉴스되는 세상
 이태영 박사의 삶 떠올리며 용기를 얻자

므네모시네(Mnemosyne)는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을 주관하는 우라노스와 땅을 돌보는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6명의 딸 중 한 명이다.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연못을 관장하는 신으로 제우스와의 사이에서는 역사, 서정시, 비극, 찬가 등을 은유하는 아홉 명의 뮤즈를 낳았다. 이 신화는 하늘과 땅이 구별될 때부터 인류에게 ‘기억’이 간절히 필요했고, 예술을 비롯한 대개의 인문활동이 삶에 얽힌 기억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은유하고 있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 닿고 미래로 이어지게 하여 시간의 연속성을 완성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많은 독재자는 사람들의 기억을 왜곡하고, 망각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아닌 ‘기억해야만 하는 일’들이 기어코 살아남았다. 전해지는 기억들은 세상을 바꾸고, 누군가의 고백은 짙은 어둠을 걷어낸다. 기억의 힘은 강하다.


2020년 지금의 한국을 사는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만 하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태영 박사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태영 박사는 1914년 8월 10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3남매를 키우던 중, 해방 1년 후인 1946년 3월 서울대 법대 최초이자 유일한 여학생이 된다. 그의 나이 32세 때다. 일제 강점기 시절, 감옥에 갇힌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삶을 돌봤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었을까. 그의 남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정일형은 “이제 보따리를 바꿔 맵시다. 기다리던 세월이 바로 지금 왔으니 법률 공부를 하시오”라는 말과 함께 아내의 학업을 응원했다고 한다.

이태영은 1952년 여성 최초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다. 사법관 실습생 신분이 된 그의 눈에 ‘신민법 초안’에 담긴 여성차별조항들이 보였다. 어머니가 제외된 친권행사, 여자가 제외된 양자제도, 남자를 우선시하는 재산상속 등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그는 ‘민법 심의 요강에 대한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신민법은 바뀌지 않고 초안대로 공표됐다.
당시 법안 초안을 작성한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태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해진다.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잘살고 있는데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법률 좀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느냐,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가족법의 일자일획도 못 고친다.”

사법관 실습을 마친 이태영은 판사 임용도 거부당한다. “여자 판사는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 또 야당 정치인의 부인을 판사로 임용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은 이태영이 변호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자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태영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 집에다 사무소를 열었는데 안방 건넌방 마루방 우는 여자만 하루 종일 앉아있으니까.. 이런 불쌍한 여성만 계속해서 오니까 내가 그땐 아찔”했다 한다. 그러나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비용도 없이 찾아온 그들에게 점심, 저녁 식사까지 챙겨주며 여성에 대한 법률 지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1956년 8월에 설립된 것이 여성법률사무소 (현재의 가정법률상담소)이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을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진행하고, 동시에 남성 중심의 법 제도를 바꾸는 운동도 진행했다.

이태영 변호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지난한 노력으로 1989년 12월 19일 3차 가족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개정안에 담긴 주요한 내용은 ‘장남의 호주 자동 승계 조항 수정’, ’이혼 시 재산분할 청구권 신설’, ’부모 친권 공동 행사’, ’친족 범위 부부 모두 4촌까지로 조정’ 등이다.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들은 이날 이전까지는 여성이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금기였다.

이태영은 한 인터뷰를 통해 “1989년에는 전력을 다해서 밥 먹고 자지 않고 거의 운동을 했는데, 그게 나만이 아니라 한국 여성이 전부 합해서 한” 덕분이라고 공을 나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중심에 이태영이 37년간 굳건히 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힘을 합할 수 있었다는 걸 모르는 이 없다.

“법률 구조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법을 몰라 고통 받던 여자들을 껴안고 울어야 했으며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것 등 내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 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고 이태영은 말한다. 그가 걸어온 길 위에서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그냥 열심히 걸어”온 그가 감당했어야 하는 ‘여성 최초’라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무서웠을지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럽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나머지 절반인 남성, 그리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헌신해 온 이태영.
1997년 3차 가족법 개정에서 제외됐던 동성동본 금혼령도 폐지되고, 2005년 3월 2일 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태영의 운동은 그의 삶을 뛰어넘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태영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도 잠잠할 날 없는 요즘이다.
“부양가족 있다”며 선처받은 아동 성착취범 손정우의 결혼 취소 소식보다 류호정 의원이 입은 원피스가 뉴스거리가 된다.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기는 할까 의심스러운 지금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지금과는 견딜 수 없는 억압을 묵묵히 돌파하고 새 시대를 만들어온 사람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며칠 뒤 8월 10일은 이태영 박사의 생일이다. 100년 전 그의 삶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자.

출처 : 여성신문(http://www.wome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