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박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1-30 10:51     조회 :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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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박사

【목 차】
Ⅰ. 서론
Ⅱ.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전개과정
Ⅲ. 이태영의 성장배경과 시련
Ⅳ. 주부학생 이태영의 사법고시 합격
Ⅴ. 법률상담소와 가족법 개정운동
Ⅵ. 가족법 개정운동의 경과
Ⅶ. 결론

# 참고문헌

Ⅰ. 서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특히 유교사상이 강하게 뿌리내린 조선시대 이후로 남존여비사상이 깊이 자리잡아오던 나라였다. 이러한 남녀 차별은 불과 10-20년 전만해도 당연시되어 왔고, 이를 전제로 한 남아선호사상,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을 심심지 않게 들어 왔다. 하다 못 해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TV에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억지하나로 여자 위에서 군림하려드는 남성 상을 쉽사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이 들린다면 가만히 있을 여성이 있을까. 요즘은 남성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 심지어는 기존 우리의 생활 방식과 반대로 여자가 직장생활을 하고 남자가 살림을 도맡아 전업주부가 되는 모습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농담으로 주고받던 말들이 현실화되고 있고, 극대화된 상황을 가상해보던 것들이 사실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현실이 있기까지 누군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며 성취해 낸 것인지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남성들이 강한 자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권력을 고수하고자 할 때,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직접 발로 뛴 여성들이 있다. 그분들 중에 우리는 법의 사회 구조적 역할을 통해 남녀 평등의 기준을 변화시킨 데 큰 공을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전개과정
해방 후 ‘건국부녀동맹’은 1945년 12월 22일부터 3일간에 걸쳐 열린 전국 부녀단체 대표자 대회에서‘조선부녀총동맹(이하 부총)’으로 개편되었다. 부총은 지도층의 경우에는 일제하 항일운동과 근우회 등의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념의 주체로서 지식층 여성뿐만 아니라 농가 부녀*도시주부*노동 여성까지를 포괄하고 실질적으로 각 계층의 여성들을 기반으로 운영하였기에 광범한 여성 대중 조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령에서 제시한 거t처럼 여성 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하여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광범한 여성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총은 사회주의 계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7년 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다시 남로당 부녀부로 위축되어갔다. 우익계여성들은 1945년 8월 25일 임영신,이은해를 중심으로 여자국민당을 결성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에는 한국애국부인회 결성 총회를 개최하였다.1946년 11월 5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여자국민당, 미군정청 부녀국 등 8개 단체가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을 결성하여 연대활동을 모색하였다.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시기는 단독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부터였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였으며 총선거법에 대한 해설 강연회를 열어 여성들의 총선거 참가를 적극 촉구하였고 특히 이번 선거에서 여성 대표자를 국회에 보내어 여성의 권리를 찾자는 것이었다. 이때의 여성운동은 단정과 비단정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서 미군정이 단정을 지원함에 따라 단정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좌익과 중도파의 소멸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1950,60년대는 여성운동의 침체기였는데 우선 1950년대의 활동을 살펴보면 미군정기의 여성운동 과정에서 좌익과 중도파가 소멸됨에 따라 그 이후의 여성운동은 반제*반봉건적 여성운동의 흐름이 단절된 채, 일제하 친일적인 교육*계몽*여권 운동과 미군정기의 친미적이며 반공적인 여성운동의 흐름이 맥을 잇게 되었다. 4.19 혁명직후 대한부인회 등 여성단체의 간부들은 부정선거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5.16이후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체되면서 여성단체도 모두 해체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등 당시의 상황은 가장을 잃은 부녀, 이산가족 등의 문제를 파생시켜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구호*보호*선도가 여성문제의 급선무로 떠오르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여성단체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 여성문제연구원(1952)이 설립되었다. 여성문제 연구원은 황신덕, 박순천, 이태영, 이회호 등 17인의 발기로 발족되어 여성의 법적 지위개선을 위한 연구활동을 시도하였다. 남녀쌍벌죄 적용을 규정한 형법 개정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으며 다른 단체와 연대하여 여성의 법적 지위향상 위원회를 조직하여 계몽과 여론에 힘을 썼다. 1950년대 후반에 오면서 가정법률상담소, JOC(카톨릭 노동청년회) 부녀회 등에서 여성의 법적 문제 혹은 노동 과정에서 문제점 해결에 도움을 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산업화정책 추진에 따른 도시화와 사회분화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단체활동의 요구로 이어져 20여 개의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주로 서울에 기반을 두었고, 성격과 활동 방향은 보수적이고 안이하였다. 당시 여성단체들은 강압적으로 집권한 박 정권의 안정과 연장을 지지하도록 강요당한 상태에서 잠재해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과 요구를 수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단체의 조직적 기반이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나 재정적 기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므로써 사적 조직으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있었으며 특히 정부의 지원을 대가로 정권과 야합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그나마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1953년부터 전개되어온 가족법 개정운동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여성 대다수의 인식을 고양하고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청원이라는 방식을 통한 지위향상운동에 머물렀다.
여성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하게된 1970년대는 우선 생산직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대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는 50,60년대와는 달리 여성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여성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60년대이래 수출 일변도의 파행적 산업화로 한국사회의 모순이 심화*확대되면서 여성운동은 노동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여성노동자 운동은 60년대 후반부터 자연발생적인 농성과 파업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70년대 중반을 거치며 노조 내에서 여성지부장이 선출되는 등 여성 지도력이 차츰 성장하게 되었다. 70년대 민주노조 중심의 여성 노동자 생존권 투쟁은 조직적이고 격렬하였다. 동일방직 노조에서는 1972년 여성 지부장을 뽑아 월차 및 생리휴가 등을 쟁취하였고, 이후 계속된 민주노조 와해 공작에 맞서 싸웠으며, 유신말기인 1978년에는 회사로부터 똥물세례까지 받았다. 70년대에 들어와서도 기존의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권익 확보나 문제해결을 뒷전에 둔 채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부녀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하여 권력의 충실한 보조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성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하고 문제를 제기한 계층은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여성 해방운동에 공감하면서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주로 법적*제도적 영역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남녀불평등의 사례를 시정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밖에 가정법률상담소 중심의 가족법 개정운동,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중심의 기생관광 반대운동, YWCA등의 결혼 각서제 폐지 운동, 여성유권자연맹의 여성근로자 교육활동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1973년에는 ‘범여성가족법개정추진위원회’(당시 이 단체에 이태영 박사가 부회장이었다.)가 결성되어 강력히 가족법 개정운동을 추진하였으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한국 여성운동의 목표가 민주화 운동 및 분단시대라는 맥락 속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제기되었다. 이는 그 자체로서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이후 여성운동의 논의에 많은 것을 시사하였고 80년대 본격적 여성운동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같이 70년대 들어서 여성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여성운동이 그 기초를 닦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여성 연구의 활성화와 여성이론의 탐구에 힘입은 바 컸다. 80년대 접어들면서 여성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성단체와 여성기구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70년대 여성문제의 제기와 올바른 인식 정립의 모색이라는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사회운동권과 사회과학 이론의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제 여성 문제를 전체 사회 구조의 모순과 함께 총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새롭게 나타났다. 여성평우회(1983)는 바로 이러한 여성운동 방향의 새로운 모색 속에서 등장한 대표적 단체였다. 80년대 중반이후의 여성운동을 여성 대중의 의식 성장에 기초하여 운동의 범주가 계층*계급별로 준화되고 각기 부문 운동으로서 발전되어갔다. 특히 86년에 들어서면서 부천서 성고문사건 대책활동( 86년 권양 성고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의 변호를 이태영 변호사가 맡았다.), KBS시청료 거부 운동, 87년 6월의 민주화 투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반적인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면서 여성들의 정치 의식이 높아졌다. 당시 여성 노동자, 여성농민, 부인 등이 광범위한 대중 투쟁을 통해 여성운동의 주체로서 부상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각 계급*계층 내 여성부문의 구축이 현실화되었다. 이렇게 80년대에는 여성들이 각 계층별로 각 부문에서 크게 생존권 투쟁, 성차별 폐지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또 이외에도 중요하게 남녀고용법 제정(1987) 및 개정운동과 AIDS추방운동, 여성폭력 추방운동, 인신매매의 근절, 강간 경찰규탄, 가족법 개정운동(1989), 모자복지법의 제정(1989)등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계층별로 부문 운동으로 전개되었던 여성운동은 1986년 봄, 여성운동단체들이 여성노동 문제를 여성문제의 중심 과제로 규정하면서 연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면서 7월7일 보다 확대된 여성단체연합(26개 단체)으로 성고문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당시 정권의 부도덕성을 폭로하고 전단 배포, 소식지 발간, 고발 및 대중집회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80년대의 여성운동이 대중화*조직화*연대의 공고화*전구화 등의 양상을 띠고 민족*민주 운동으로서 여성들의 구체적인 이해와 요구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해방 이념의 과학적 체계를 갖추기 위한 모색 곳에서 가능하였다. 한국 사회의 여성문제가 무엇이며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해방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8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82년 이화여자대학원에 여성학과가 설치되고 1984년 한국여성학회가 발족되면서 좀더 이론적 차원에서 여성문제가 제기되고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는 여성운동이 다변화되고 특히, 기본적으로 여러 부문운동의 연대화가 이루어지고 전문화 영역들을 만들어 갔다. 무엇보다 법적*제도적 차원에서의 여성 지위 향상운동이 전개되어갔다는 점도 중요하다. 90년대 여성운동의 중요 이슈 중 하나가 여성 관련 법조항의 제정과 개정이었다. 여성 관련법들의 제정과 개정은 80년대 운동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90년대 들어와서도 여성 운동계의 중요 이슈로서 부각되었고 특히 여성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법들의 제정과 개정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중요하게 가족법개정을 비롯한 법적 불평등의 개정을 시도하였는데 90년의 개정에서는 호주의 권리*의무 조항을 대폭 삭제하고, 호주상속을 호주승계제로 하고, 이혼시 재산 분할권을 신설하고, 친권제도, 재산상속제도 등의 규정을 개정하였으며,97년에는 동성동본 혼인을 금지하는 민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리고 97년에는 국적법을 개정하여 자녀국적은 부모양계주의를, 부부국적은 선택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95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을 이루어내 미비한 부분의 일부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여성계는 평등을 촉진하는 지원법의 제정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95년에 여성발전 기본법이 제정되었으며, 91년에는 영유아보육법이 제정되고 97년 개정되었다. 또한 종전에는 사적 영역으로서 간주되어온 부분들에 대한 법들의 제정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 부분은 90년대 여성 관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개설되었고 한국 여성의 전화 등 4개 단체가 성폭력 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투쟁으로 성폭력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 즉 성폭력특별법의 제정(1994)을 따내었다. 또한 여성계가 94년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 것으로, 96년 이상희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유권자 연맹을 비롯한 사회단체22개가 중심이 되어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제정을 강력히 요구한 결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과 ‘가정폭력범죄처벌에 관한 특례법’(1997년 제정) 등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투쟁과 성과는 여성운동의 역량이 크게 성장하였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90년대 여성운동에서는 무엇보다도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보여주었던 연대활동을 정치세력화하여 여성들의 불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찾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여성운동의 활성화는 그 동안 여성운동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운동가들이 배출되고, 여성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 큰 요인이었다. 여성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고, 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는 이 같은 활발한 현상은 다양한 부분에서의 전문가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는 이론적인 면에서만이 아닌 구체적 현실의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로까지 여성학의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다.

Ⅲ. 이태영의 성장배경과 시련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로 또한 최초의 여성법학 박사, 최초의 여성 법과대학장으로 가진 것 없고, 가진 것마저 빼앗긴 사람을 위하여 한평생을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
이태영은 1914년 9월 18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진동마을에서 아버지 이흥국과 어머니 김흥원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갑이었던 부모님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태영의 위로는 12살된 큰오빠 태윤과 3살 된 작은 오빠 태흡이 있었다. 어머니는 초기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신앙심이 돈독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탄광사고로 30세때 세상을 떠나셨다. 태영이 막 첫돌을 지낸 무렵이었다. 서른에 홀로된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태영은 살아오는 동안 친정어머니처럼 부지런한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생활력이 강해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막일도 거뜬히 해내는 가하면 시장에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여 쌀, 옷감, 돗자리 등 닥치는 대로 팔고 직접 강아지나 돼지등을 길러 파는 일도 있었다. 이에 어린 태영도 일찍부터 일을 배웠고 자식을 강인하게 키우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한 이웃과 나눠먹고 나눠쓰는 것에는 절대 인식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어린 태영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돕고 정의를 변호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할 것이다. 태영은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교회에서 웅변을 한 경험이 많았다. 그리고 일곱 살에 소학교를 들어가서 선생님이 다른 언니를 웅변대회에 나갈 사람으로 뽑자 선생님을 찾아가 자기도 대회에 나가도록 해 달라고 해서 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장남인 태윤은 일본에 있는 전문학교, 둘째아들 태흡은 연희전문학교, 막내딸 태영은 이화전문학교로 진학하였으며 태영은 자랄수록 아버지역할을 톡톡히 해 낸 12살위 큰오빠 태윤의 영향으로 (변호사가 뭔지도 몰랐지만) 변호사가 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태영은 제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운동실력이 뛰어났으며 일도 억척스럽게 해내 영변에서 황소같은 소녀라는 소리를 곧잘 듣곤 하였다.
태영은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 2학년때 평양정의고등학교에서 실시한 편입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게 된다. 평양의 학창시절은 태영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태영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큰오빠는 많은 법률관계 책을 사다주곤 했다. 처음 기숙사 생활에서는 눈물도 많이 흘리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1학기 반1등을 하였고 차츰 교우관계도 원만해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편입한 이후로 줄곧 수석을 지켜왔음에도 3학년으로 들어온 태영은 메달을 받지 못하고 대신 졸업생 답사를 낭독하였다. 상급학교는 제일 우수한 학교로 진학할 것을 결심하고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황달병에 걸렸다. 이때 만 17세의 태영에게 자신이 다녔던 북진의 광동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와 달라는 제의를 해와 그 직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점점 회의가 밀려들었고 공부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차츰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18세가 되자 혼담이 오갔는데 어머니, 큰오빠 모두 대찬성이었고 곧 성사될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태영이 이화여전 가사과에 진학한 뒤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학비 걱정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자 태영은 혼인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혼담은 없던 일이 되었으며, 이후 태영은 1학년이 끝날 무렵 특대생이 된 이후 3년간 계속 특대생이 되어 학비를 면제받으며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시 이화여전에는 법학과가 없어 부득이 가사학과를 다녔는데 이를 알게된 법률경제 과목을 담당했던 정광현 교수가 첫 중간시험을 치르고 처음 태영을 불러 “내가 3년 동안 법률공부를 도맡아 해주겠어.” 이후 가사과 공부와 법학 공부를 병행하며 열성적으로 학업에 몰두하였고 이에 정광현 교수도 일일이 보살펴주며 지도해 주었다. 졸업반 시절 태영은〈제2세대의 인형〉라는 연제로 여성해방 문제를 웅변하여, 야유와 폭언, 욕설을 받으면서 관중석이 아수라장이 되고 웅변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뜻밖으로 1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석졸업생으로 받은 상장과 이왕가(李王家) 은메달을 가슴에 안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곧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잠시 교사생활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으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여성문제에 더욱 관심을 쏟아 우선 기생실태를 조사하고자 대동강변의 기생학교를 찾아가 며칠동안 기생이 되려는 학생들과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화여전시절부터 좋은 혼사 자리도 많이 들어왔으나 분주한 교회일과 학교일 속에서 정일형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태영과 성장과정이 많았던 정일형은 7년간의 미국공부를 마치고 연희전문학교 사회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사표를 내고 평양에서 개척교회를 일구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공장근로자를 위해 그것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동네에 창고교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때 태영은 남편 정일형 박사를 만나게 되고 시어머니 ‘한은총’ 과도 함께 살게 된다. 시어머니도 태영의 어머니처럼 23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 정일형과 유복녀 정신형을 데리고 극심한 고생을 하였으며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강인하게 살아오신 똑똑한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내야했고, 일본경찰에 수시로 불려다니며 감옥을 드나들었던 남편으로 인해 태영 자신도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첫째 아이를 3개월만에 잃고 남편의 쉴틈없는 수감생활과 그 뒷바라지, 교회일에만 전념하시던 시어머니로 인해 모든 집안일 해내기도 벅찬 하루하루를 해나갔다.
특히 일제 말기 7년간은 태영의 생애에서 가장 지독한 나날이었다. 남편이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연금되어 있는 동안, 남편옥바라지를 위해 누비이불 장사까지 했다. 누비조합을 찾아가서 염색까지 배워 직접 길거리에 나가 누비이불을 팔았다. 전문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한낮 누비이불 장사를 해야 한다는게 부끄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째딸을 업은 채 머리에는 이불보따리를 이고 손에는 큰딸의 손을 잡고 장사를 하러 길바닥을 헤메고 다니며 작은 오빠의 친구이며 혼담이 오갔던 옛 고향사람을 마주치기도 하고, 태영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수근거리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태영은 냉천동 골목을 나와 교남동의 ‘서흥상회’ 라는 누비이불 가게를 차렸다. 이 점포는 태영이 처음 가져본 가게이자 마지막 가게였다. 그러던 중 이화여전시절 법률공부를 가르치던 정광현 교수는 태영을 보자 대뜸, “태영이도 별수 없군. 법률공부는 아주 집어치운 거야! 이제 공부는 다 글렀군.”하며 가정을 지키며 꿋꿋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려는 태영에게 안타까움과 실망을 금치 못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하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태영부부에게 이만큼 기쁜 일이 없었다. 곧 정일형은 태영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울 거리를 걸어도 뒤에 아무도 따라 다니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소. 아무도 나를 가둘 사람이 없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소. 여보, 이제 보따리를 바꿔 맵시다. 기다리던 그 세월이 바로 지금 왔으니 평생 소원이던 법률공부를 하시오. 머리털 뽑아 신은 못 삼을 지언정 결초보은하겠소. 아무 미련없이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시오. 그토록 당신이 원하던 전화까지 놓아졌으니 빨리와야 하지 않겠소?” 태영은 당장 사과상자에서 법학책을 꺼내들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오는 길에 법학통론을 두 번 보았다.

Ⅳ. 주부학생 이태영의 사법고시 합격
8.15해방이 되고 사회 전역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일제시대 일본인 학생들은 많이 뽑았으나 한국인 학생들은 고작 30-40여명 뽑았던 경성제국대학시대와는 달리 국립서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많이 뽑았다. 그러자 학교 수준이 저하되고, 입학하기가 퍽 수월해졌다. 나중에는 중학교 나온사람, 전문학교 나온사람, 대학 중퇴한 사람, 강의록으로 공부한 사람, 유치원교사,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청년들이 대거 서울대학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해방직후 이화전문학교 교장 김활란 박사는 옛 제자 이태영을 불러 가사과 교수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며 “법학은 태영이가 안해도 남자들이 다 하지 않겠어?”라고 하였는데 이에 태영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법학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침 일본인들이 다 물러가고 법조인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는 속성코스로 수 많은 법조인을 뽑기로 하였다. 이러한 자격시험에 뱃심좋게 응시를 하였으나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여 지금의 사법시험이 그렇게 쉽게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태영은 낙제점수를 받고 낙심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인 1946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에 남녀공학제도가 실시되었다. 태영은 서울대학 사상최초의 여학생, 그것도 33세의 가정주부로 당당하게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교수와 강사로서 강의를 했던 사람은 유진오, 김갑수, 김증한, 주재황, 황산덕, 우기천, 김성칠, 정광현, 홍진기등이 있었다. 그때까지 태영도 서울대학에 남녀공학제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터라 이화전문 강사 등록을 마친 뒤였다. 사표를 내러가니 김활란 총장은 버럭 화를 내며 끝내 사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몰래 비서실에 슬그머니 사표와 편지를 놓고 서울대학에 입학수속을 마쳤다. 연하의 남자 대학생들은 하나같이 재사이고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학문을 토론하는 태도와 논문작성법과 사고능력 같은 것이 여자전문학교시절과는 딴판이었다. 그 틈에 끼어 함께 지내는 동안 태영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신기하게 지켜보며 함께하였고,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정일형씨와 태영은 민족지도자 중에서도 서재필 박사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고, 정일형씨는 이승만씨와도 선후배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한미국 초대 특사가 된 남편 정일형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입각요청을 사양하고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였다. 중구 지역 합동유세장에서는 정일형 후보의 연설 후에 정인보선생과 태영이 찬조연사로 나와 연설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결혼한 내외가 다닐 때도 아내는 몇 발짝 뒤에서 조용히 걸어나오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젊은 여성이 남편 선거유세에 연사로 나와 말을 하자, 일부사람은 거부감을 일으켜 태영의 찬조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야유를 쏟아 보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러나 태영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거시 아니라 알을 낳습니다. 암탉이 울면 병아리를 낳고 계란을 만듭니다. 암탉이 울면 새벽이 옵니다.”라고 맞받아 쳤다. 다수의 유권자들에게는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선거결과 정일형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치열한 선거운동의 고난을 이겨내고 정일형 박사가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지 한달도 안되는 그해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 1.4후퇴 때 태영의 가족과 남자 동창생들이 모두 한 트럭에 몸을 싣고 부산 피난길을 떠났는데 부산 피난 시절 정일형씨는 국회의원이자 대한통신사 사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부산 정치 파동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야당과 재야 세력은 정의로웠는데 집권세력은 정의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야당과 재야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그 당시의 전시 상황과 집권세력의 입장의 시각으로도 볼 수 있는 다각적인 시각도 필요하다.)으로 하는 수 없이 대한 통신사를 내 놓았다. 부산 피난 시절 5.26 정치 파동이 발생하자 태영은 반대시위에 앞장섰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많은 국민과 연합군이 죽어가고 있는 데 여자라는 이유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신을 생각해 보다 김활란 선생님을 찾아갔다. 수시간에 걸쳐 태영은 구상하는 계획을 이야기하고 함께 나서주실 것을 간절하게 부탁드렸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의 태도는 의외였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며 따 잘라 거절해 버렸다. “그러면 저는 정치인이라서 나서는 겁니까?”...태영은 마구 대들었다. 그리고는 자기를 대접하려고 내놓은 커피와 케이크를 떠밀어 버렸다. 그때 마침 김활란 선생의 친구를 진찰하려고 서양의사가 찾아왔다는 기별이 오자 김활란 선생이 일어나려고 했다. 태영은 김활란 박사의 팔을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서양의사면 답니까? 민주주의 하라고 목에서 피가 나라고 떠드는데 어딜 가세요. 못 일어나세요. 제발 마저 다 들으세요.” “이 철없는 것아, 이승만 대통령이 내 말을 들을 사람이냐?” 김활란 선생은 그만 흐느껴 눈물을 지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대체 너는 언제 가야 철이 들겠냐는 딱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은 정치가가 아니어서 민주주의가 되건 공산주의가 되건 관계가 없다는 겁니까? 선생님이 나서서 민주주의 실천하자고 하면 안될 일도 다 될 것인데, 너무 무책임하십니다. 선생님! 다시는 정치 안 하실 거지요? 내가 살아서 꼭 지켜보겠어요.“ 태영은 바락 악을 쓰고 방을 나와 버렸다. 도저히 은사에게 할 도리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가는 모습에 흥분한 태영이 김활란 선생 앞에서 그만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어느 정권에게든지 협력하면서 고생없이 살아온 김활란 선생에게 그런 요구를 한 것 자체가 감정적인 것이었다. 태영은 자신이 너무 경솔하였다며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제1회 고등고시에 낙방하고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남편의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느라 정신없이 지냈던 태영은 그해 1952년 부산에서 제2회 고등고시를 실시한다는 뜻밖의 소식을 알게되었다. 태영은 제2회 고등고시가 마지막 기회라고 결심하고 여한이 없게 한번만 더 응시해보겠다고 가족들에게 의사를 표시했다. 시어머니, 남편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쾌히 찬성하였다. 태영의 동래 초가집 생활( 육종학자 김종 선생운전기사의 초가집 윗방에서 무료 하숙을 하였는데 김종 선생 부인이 세끼니를 매일같이 연못하나를 사이에 둔 50미터이상의 거리를 날라다 주었다.)은 거의 판에 박은 듯한 생활이었다. 먼동이 트이기 전에 뒷산에 올라 찬물로 세수부터 하고, 물을 떠가지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떠가지고 들어간 물에 수건을 적셔 머리에 얹고, 머리를 식히노라면 어느새 새벽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전고투를 매일 반복하며, 기나긴 여름 낮과 밤을 삼베 방석이 솜처럼 되어 녹도록 뭉개고 앉아 공부를 하였다.
1952년 8월에 시험을 치르고 12월21일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합격이었다. 합격자명단이 발표되자 마자 신문잡지는 태영의 이름을 알아내고는 일제히 뉴스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가정 부인으로서 사법관에 당당히 합격하여 우리나라 역사이래 처음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다.”라는 거의 유사한 논조의 기사들이었다. 태영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개월 뒤에 사법관시보를 마친 후 판사를 지원하고 발령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시동기들 모두가 원하는 대로 임명을 받았는데 유독 태영만 6개월이 지나도록 임명소식이 없었다. 대법원장 김병로와 이승만 사이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라는 말이 오갔으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고, 태영 혼자 판사가 되고자 펄쩍뛰었을 뿐 법조계나 사회에서는 무관심이었다. 하는 수 없이 판사지망을 포기하고 변호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태영은 정치권력자의 횡포로 탄압을 받은 첫 번째 법조인이었던 것이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정일형 의원은 또다시 서울 중구 을구에서 출마하였다. 원숙한 중년 여성이 된 태영도 원피스 자락과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지역구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4년전만 하더라도 아녀자가 너무 나선다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이제 인식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해. 정일형 씨의 아내는 여자 변호사가 되었다네. 정일형씨는 아내가 예쁘고 똑똑해서 좋겠다.“ 태영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저 태영이 웃으며 걸어다니기만 해도 표는 굴러들어오는 격이었다. 결국 주위의 도움에 힘입어 정일형씨는 재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Ⅴ. 법률상담소와 가족법 개정운동
태영은 20대의 어린 청년들은 모두 판사 임명을 받았는데, 38세된 자신만 본의 아니게 판사 임명을 받지 못하게 되자 몹시 분개하기도 했으나 곧 담담한 심정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위치에서 즉, 변호사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하기로 했다. 집에 차린 변호사 사무실에는 마치 5천년 역사 이내 최초의 여성변호사의 출현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성들은 몰려들었다. 하지만 변호사 사무실은 사업 장소가 아닌 하소연 듣는 장소로 변했다. 이처럼 불우한 여인들을 상대로 2년간 독특한 변호사 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무지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위한 법률부조 기관을 세워야겠다는 구상이 자연스럽게 가다듬어졌다. 그런 확고한 판단이 서자 즉시 변호사 간판을 뜯어내고 법률상담소를 차리기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던 안방에서 나와 사회적 차원에서 이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무관심과 냉대의 장벽에 부딪쳤다. 선배 여성지도자들과 재력있는 여성들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김활란 박사를 찾아갔을 때, “단 네가 알아서 해라. 너의 책상, 너의 돈 가지고 와서 하려면 하라.”는 냉정한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여성문제연구원장 황신덕 선생을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여성 법률부조기관의 개설계획은 그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6년 6월 8일 여성문제연구원은 이 사업을 준비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명칭은 ‘여성법률상담소’로 결정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태영이 사법관시보로 법관 실무수습을 받고 있던 어느 날 신언간 검사가 법전편찬위원회에서 남녀평등 사상에 입각한 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가 노장들로부터 환관이라는 야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법 중 친족상속 편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정광현 교수의 지도로 작성된 건의문은 남자만의 호주제도, 부부재산 제도상의 남성우위성, 친권행사에서 어머니의 제외, 남자만을 양자로 삼는 문제, 재산상속에서의 남자의 우선순위 등을 개선하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형법에서의 간통쌍벌제, 근로기준법에서 여성지위향상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가족법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가지고 김병로 대법원장을 찾아갔으나 굳은 얼굴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 법의 일자 일획도 못 고칩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태영에게 “법조계의 초년생이면서 벌써부터 건방지게 법을 고치려고 나서다니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 “조그만 것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벌써 휘젓고 다니느냐? 1천 5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좋다고 잘 살고 있는데 어째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태영은 간신히 황신덕, 표경조 선생등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그 방을 물러나왔다. 그후 결국 김병로 대법원장이 퇴임하던 1957년 여성단체들의 압력과 의원들의 협력으로 개정안은 타협된 형식으로 통과되었다. 개정내용은 분가의 자유, 이혼사유의 남녀평등, 상속에 여성의 참여, 아들이 없을 때 여자 호주, 처의 무능력제도 폐지, 여자가 양친과 양녀가 될 수 있는 제도 등이었다.
1959년 세칭 전 (前) 부흥부 차관 부인 간통사건의 안 여인을 변호했을 때의 일이다. 그 사건은 평생 축첩을 하며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던 남편이 부인이 댄스교사와 왕래했다고 부인을 간통죄로 걸어 이혼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는데, 사건 자체가 흥미로운 데다가 관계자들의 사회적 지위, 고등교육까지 받은 부안 또한 이목을 끌만한 요인이 되었다. 신문의 떠들석한 기사와 장기간의 수임사건이었던 이 사건이 진행되던 어느 날, 당시 법무장관 홍진기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무슨 사건을 그렇게 처리합니까?”라며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그 집안 자식들까지 모두 망신시켜 가면서 무슨 사건소송을 그렇게 많이 끌고 가느냐 이쯤됐으면 조용히 이혼시키라”고 꾸짖었다. 반박을 하며 대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 뒤로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절대 이혼은 안 시킬 것, 만약 이혼이 불가피한 경우라면 갖은 음모를 다하는 남편이라 하더라도 그 남자와 부인을 불러 남몰래 소리없이 조정을 통해 이혼시켜 주는 것을 상담소의 원칙으로 삼았다. 1957년 8월 태영은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갔는데, 강의를 듣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점이 많아 귀국해서는 가정법원의 설치 제안자가 되어 오늘의 가정법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법률구조 사업에 대한 확신으로 적극 추진할 의욕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내 1986년 법률구조법 제정을 하게 되었다. 미국여행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한국법제사에 기록될 만한 일을 한 것이다. 정치생활 내내 야당생활을 한 남편 정일형씨는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정일형박사만이 정권이양을 인정하지 않아 밤낮으로 무장 군인에 의해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부정축재라는 명분을 내세워 가택수사를 벌였고, 그 후에도 외무장관 재직시의 일들을 들추어 냈지만 결국 부정축재의 혐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상장만한 커다란 확인서를 떼어주면서 모든 조사를 끝마쳤다. 가정법률상담소가 발전은 하고 있었으나 재정문제 등 국민의 관심과 이해가 적어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상담소의 장래가 염려스러웠기도 하고, 5.16쿠데타 이후 반년 동안이나 상담소에 나가지 못해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그로 인해 상담소를 운영해 갈 인재를 양성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0년간 단 한명의 고시합격자도 없어 존폐위기에 있던 이화여대의 법정대학장을 맡게되었다. 이는 김옥길 총장의 요청대로 학교 복도를 왔다갔다 하며 치맛바람을 날렸는데 정말 법학, 정치학 박사, 경제학 박사가 배추f되고 연이어 고시합격자가 탄생했다. 그 박사들은 거의 다 태영처럼 가정을 갖고 자녀를 키우는 아줌마 생인데 그저 신통하기만 했다. 태영이 준비하던 ‘한국여성사’를 이화대학에서 펴낼 것을 주장하여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어 이를 이화의 명의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70을 바라보던 정일형 씨는 선거 준비를 하던 중 19971년 1월 말경 김대중씨와 미국에 다녀왔는데,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어 화재가 일어났다. 일명 ‘애완동물 화재사건’으로 집 한채를 태우고 서화, 태영 내외가 집필 중이던 많은 원고들의 잿더미만 남았다. 화재 당시 남편은 미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공항에 마중나온 태영은 말하기가 곤혹스러웠다. 공항을 떠나올 무렵 태영은 조심스레 화재사건을 말해 주었다. “조금 탔어요.” 그러던 것이 한강을 넘을 때는, “ 절반정도 탔어요."그리고 동네 골목 어귀에 이르렀을 때는 ”모두 탔어요,“ 사실대로 토로했다. 잿더미가 된 집을 둘러본 정일형 의원은 ” 그래 다 탔군.“ 할 뿐 덤덤한 표정이었다. 김대중납치 사건이 일어난 얼마후 정일형씨는 국회에서 폭탄적인 발언을 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 ”누가 한 짓인지 뻔하지 않은가.“등의 발언에 12회이상 마이크가 끊어지고 여당의원들의 고함과 폭언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여당의 의원들이 단상으로 뛰어오르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서로 싸움이 벌어졌다, 정일형 후보가 발길에 채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장출혈이 일어난 그는 결국 뇌혈전증으로 악화되고 상처난 자리에 생긴 장암은 후일 죽음을 불렀다. 71년 이화여대 법정대학 학장에서 사임하고 신민당에 들어가서 대통령후보 선거 유세를 지원하였다. 그해 제1회 세계평화상을 받았다. 다음해는 법률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75년에는 막사이사이 상 사회지도 부문 수상을 하였다. 76년 이름바 명동사건으로 불려지는 3․1민주구국 선언에 참여하여 군사독재 정원에 도전하여 3년 실형선고를 받아 남편은 8선 국회의원에서 의원직을 내놓게 되었으며, 아내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고, 동시에 대학의 강사, 기관의 이사, 재판소 조정위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해는 많은 어려움 끝에 여성 백인회관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외아들 정대철도 국회의원을 하게 되었다. 80년 5.18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나고 군사법정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변호사로서는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김대중을 변호하였다. 82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유네스코 인권교육상을 받았으며 다음해에 마더 테레사 수녀와 만나 봉사활동에 관한 의견교환을 하며 가깝게 지내게 되기도 하였다. 89년에는 미국대법관 브레넌 인권상을 수상하였는데 이태영 변호사 수상에 처음으로 직접 브레넌이 참석하여 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훈장 무궁화장, 서울대인상, 이화인상, 춘강상등을 수상하였고 1995년 2월 40여년간 걸어온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소장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가정상담’을 통해 글을 발표하고 이후 그녀는 98년에 봉원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Ⅵ. 가족법 개정운동의 경과
많은 결함과 모순을 가지고 있는 가족법에 대해서 그 제정 당시부터 학자들과 여성계 지도인사들은 바람직한 가족법에 대해 그 제정 당시부터 학자들과 여성계 지도인사들은 바람직한 가족법을 개정하도록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후에도 꾸준히 개정운동을 추진해 왔다. 신민법제정이전인 1953년부터 이미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가족법의 제정을 위해 여성지도자들(황신덕*이태영)과 여성단체들이 호소문, 건의서, 청원서 등을 관계 요로에 제출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인 종법제를 근간으로 하는 구민법을 거의 답습한 가족법이 제정되었다. 신민법의 실시 직후부터 그 개정의 논의와 연구는 가족법계 및 여성단체를 통해 계속되었다. 현행 민법전이 실시된 후 가족법과 그 주변 법규가 수차에 걸쳐 개정된바 있는데, 우선 62년에 법정분가 제도가 신설되고, 호적법의 제1차 개정이 수반되었으며, 63년에 이르러서는 가사심판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수반하여 호적법 제2차 개정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사심판법상의 사실상 혼인관계존부확인 청구제도의 채택 및 호적법상의 협의이혼 의사확인제도를 신설한 점은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에 간접적으로 영향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민법 중의 가족법에 관해서는 법정분가제의 신설 조항 1개 조문의 개정에 그치고 말았다. 신민법 제정 당시부터 꾸준히 개정운동을 추진해온 가정법률상담소와 YWCA연합회가 중심이었는데 차차 이 운동에 참가한 단체의 범위가 넓혀져 오다가 73년 6월28일 모든 여성단체들이 연합운동으로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의 결성대회를 가짐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참가한 단체는 61개나 되며, 동년 9월에는 가족법개정안 작성위원회를 구성하고 결성준비위원회에서 인준된10개 항목의 가족법개정요강에 따라 법안작성에 착수하여 친족․상속편의 약300개 조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는 1974년에 ‘민법 제4편 친족, 제5편 상속 개정법안 및 이유서’를 작성하여 여성국회의원(대표 이숙종)을 통해 국회에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10개항은 호주제도의 폐지, 친족범위결정에있어서의 남녀평등, 동성동본 불혼제도의 폐지, 소유 불분명한 부부재산에 대한 부부공유, 이혼배우자의 재산분배 청구권, 협의 이혼제도의 합리화, 부모의 친권공동행사, 적모서자 관계와 계모자 관계의 시정, 상속제도의 합리화, 유류분 제도의 신설 등이다.특히 의견의 대립이 심각한 것은 호주제도의 폐지와 동성동본 불혼제도의 폐지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일부 개정되어 1979년부터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후 동 촉진회는 사실상 해체되고 가정법률상담소를 비롯하여 일부 여성단체들과 가족법학자들에 의해 본래 요구하던 취지의 개정운동과 요구가 계속되어 오다가 84년 7월 18일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를 다시 구성(회원 단체73개, 총회원수1300명, 협동회원단체 9개, 후원회원단체1개)하고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87년 10월 30일, 비록 한시법이기는 하지만 ‘혼인에 관한 특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87년 12월 19일부터 88년 12월 31일 까지 시행됨으로써 그 동안 동성동본불혼 조항에 의해 혼인신고를 하지 못하고서 사실혼 관계에 있던 9585쌍의 부부가 혼인신고를 마쳤으며, 마침내 90년 1월 19일 가족법의 대폭적인 개정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1990년의 개정 가족법은 1977년 국회에 제출되어 일부 통과된 바 있는 개정안을 토대로 하여 작성된 개정안을 국회법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본래의 개정안을 수정한 대안을 마련하여 통과시킨 것이다. 개정안과 대안의 핵심적 차이는 개정안에서 폐지하기로 한 호주제도를 수정하는데 그쳤고, 동성동본불혼제도는 전혀 수정함도 없이 그대로 두고 있는 점이다. 다만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바 있다.
1990년 개정된 가족법의 내용은 (1) 친족관계에서 여계혈족을 완전히 부시하고 있던 구법상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계보자 관계와 적모서자 관계를 폐지하고 단지 인척 관계로 하였고 부가 사망한 경우 처가 친가에 복적하거나 재혼하면 인척관계가 종료되었던 것을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부부의 일방이 사망한 경우 생존 배우자가 재혼한 때에는 인척관계가 소멸하도록 하여, 구법상의 부부 차별적 규정을 부부평등하게 개정하였다. 친족의 범위를 남녀평등하게 조정하여 과거처럼 부계.모계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8촌 이내의 혈족, 4촌이내의 부계혈족은 4촌이내의 인척.배우자로 하였다.
(2) 호주제도에서는 그 자체는 남겨두되 호주권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강제적 신분상속으로서의 호주상속제도를 폐지하고 임의의 호주승계제도로 개정하였다. 즉 호주의 권리 의무를 거의 모두 삭제함으로써 호주의 지위를 형해화시키고, 호주의 직계비속 장남자의 분가 및 거가 금지 규정을 삭제하고, 호주상속 포기금지 규정을 “호주 승계권은 이를 포기할 수 있다.”고 개정함으로써 가부장제적 요소를 상당히 완화하였다.
(3) 혼인과 이혼에 대한 규정은 부부의 동거장소는 부부의 협의에 따라 정하는 것으로 하고, 이혼에 따른 자녀양육 책임 규정을 개정하여 이혼당사자가 자녀 양육에 관한 사항을 협의에 의해 결정하도록 하였다. 면접교섭권을 신설하였으며, 재산분할 청구권을 신설하여 1.협의이혼한 자의 일방은 다른 일방에 대하여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2.제1항의 재산분할에 관하여 협의가 되지 아니하거나 협의할 수 없는 때에는 가정법원은 당사자의 청구에 의하여 당사자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재산의 액수 기타 사정을 참작하여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한다. 3.제2항의 재산청구권은 이혼한 날로부터2년을 경과한 때에는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이 규정을 재판상 이혼의 경우에 준용하고 있다.
(4) 양자제도에서는 사후양자제도, 호주의 직계비속장남자의 입양금지제도등을 폐지하고 입양동의권을 행사할 직계존속이 여러명일 때에는 남녀를 가림없이 최근 존속을 선순위로 하여 동순위자가 여럿일 때에는 연장자를 선순위로 하는 등 양친과 양자를 위한 제도로 고쳤으며 (5) 친권에서는 친권은 부모가 혼인중인 때에는 부모가 공동으로 행사하고 부모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당사자의 청구에 의해 가정법원이 정하고, 혼인외의 출생자가 인지된 경우와 부모가 이혼한 경우에는 부모의 협의로 친권을 행사할 자를 정한다. (6) 후견인 제도는 후견인의 순위에서 호주를 삭제하고, 후견인의 순위규정을 개정하였다. (7) 상속법 개정은 상속법 체계의 본질적 전환을 가져오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호주상속을 호주승계의 개념을 바꾸어 친족편의 한 부분으로 구성함으로써 상속법에는 재산상속만을 규정하게 되었다. 첫째, 상속인의 범위를 축소하여 방계혈족의 상속인은 구법상의 8촌이내를 4촌 이내로 하였다. 둘째, 배우자의 상속순위를 개정하여 피상속인의 배우자는 부부평등하게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또는 피상속인의 직계존속과 동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고 그 상속인이 없는 때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 셋째, 법정상속분을 개정하여 동일가족 내에 있지 않은 여자도 다른 상속인과 동일한 상속분이 보장되고, 부의 상속분도 처의 상속분과 동일하게 한다. “피상속인의 배우자의 상속분이 직계비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는 때에는 직계비속의 상속분의 5할을 가산하고, 직계존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는 때에는 직계비속의 상속분의 5할을 가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넷째, 기여분제도 즉 유산증가에 기여한 상속인이 있으면 상속분산정에 있어서 그 기여분액을 가산하는 제도를 신설하였다. 이는 공동상속인의 협의로 정한다. 다섯째, 분묘등의 소유권은 제사를 실재로 주재하는 자가 승계한다. 특별연고자에 대한 분여제도를 신설하여 법률상 상속인이 아니더라도 피상속인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1990년 가족법 개정은 오랜 기간 많은 어려움들을 겪어가며 이루어 온 결과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문제, 다시 개정운동의 대상이 되는 가족법조항은 우선 이미 언급한대로 개정안의 핵심이었던 호주제도의 폐지와 동성동본불혼의 범위조정, 그밖에 개정안에서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처와 자녀의 입적, 자녀의 성(姓)(부성주의와 부가입적주의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혼인연령(남녀를 동일하게 할 것, 현재는 여성혼인의 최저연령은 16세), 처의 재혼금지기간 (이를 삭제해야할 것이다. 이혼 후 유독 여자만 6개월의 재혼금지기간을 두고 있는 바, 전혼과 후혼의 자녀에 대한 친생추정, 즉 부성추정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지적되었지만, 매우 예외적으로 문제될 수 있는 자녀의 추정문제는 의학적으로 그리고 가정법원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금지 규정이 없더라도 혈통분별에 별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이는 남녀의 생리적 차이를 구실로 하여 봉건적 윤리관을 지속시킬 여지가 있는 셩차별로 인정된다. 이에 2000년 10월 제출된 민법 개정안은 동 조항을 삭제하고 있다.) 등에 관한 차별조항도 검토하여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입각한 시정이 필요하겠다.

Ⅶ. 결론
우리 어머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많은 천대와 구박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것이 마땅히 차별이라는 생각도 못하고 당연스레 받아들이며 수긍하며 살아가도록 강요가 아닌 듯이 보이는 강요를 받으면서 감히 남녀평등에 대한 관념조차 황송해 하며 지내오신 것이다. 이태영 변호사는 그러한 시대 환경을 극복하며 모든 나약한 여성을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라는 사명감하나로 치열한 정치적 인생을 살아오셨다. 나는 이번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그분의 열성적인 인생에 존경을 표하며 오늘날 우리들의 위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여성들 이렇게 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남자와 다르지 않게  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분과 같은 분들의 열성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처음 대학에 와서 가족법에 대한 수업을 들었을 때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부분들이 이태영 변호사를 비롯한 이렇듯 많은 분들의 노고가 담겨 있는 법일 줄이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 여성들이 그토록 법에 의해 고통받아왔다니.., 그리고 그러한 법을 오늘날까지 고쳐오기까지 이렇듯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니..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오히려 여성이라는 것이 강점이 될 때도 있다. 이제는 딸을 더욱 선호한다는 어머니, 아버지의 여유있는 소리도 듣게 된다. 하지만 이태영 변호사가 미국에서 ‘브래넌 인권상’을 받으러 갔을 때 헌법수호의 보루라 일컬어지는 보수주의자 브래넌 대법관을 비롯한 미국법조계인사들이 다투어 “전통과 싸우느라 상처받지 않았는가?”,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물어 올 때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듯 우리 여성 모두에게도 부끄럽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준 동성동본 혼인금지제도를 아직도 안 고쳤는가. 우리는 벌써 고쳤는데...”하던 중국의 전(錢) 의원, 또 20여년 전에 상담소의 초청으로 단 한번 한국에 왔던 일본의 여성참의원 고(故) 이치가와 후사에도 “아직 가족법을 개정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법을 그대로 쓰고 있을 텐데 그것의 상당부분이 과거 일본민법이 아닌가요? 우리는 전후 헌법개정과 함께 민법도 말끔히 고쳤는데요.”라는 말을 되새겨 볼 때 지금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남녀 평등에 다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여지껏 이루어온 여성인권에 대한 수호는 소수의 배운 여성들과 몇몇 뜻있는 남성들에 의해서만 이루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좋은 여건에서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려온 혜택을 감사해 하며 대한미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뜻있는 이 길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 자손들에게는 남녀평등이라는 말이 생소하도록 해 주자. 인권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신 그분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들의 이런 환경을 개선해 나가며 우리의 자손들에게 더욱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자 현실참여의 소리에 귀기울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