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참 불편한 현장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1-03-08 09:53     조회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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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참 불편한 현장
입력2021.03.06. 오후 7:29
[동작민주올레-시즌2] 동작동 사람들 ⑥ - 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의 독립운동가들

[김학규 기자]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독립유공자묘역, 임시정부요인묘역,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 만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국가유공자묘역과 장군묘역, 충혼당과 부부위패판, 충혼탑 위패봉안관 등에 안치되어 있는 독립운동가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오늘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면서, 다소 충격적인 사실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 독립유공자와 친일파가 나란히 안장돼 있는 곳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운동가는 의열단의 유석현(1900-1987, 29)과 2·8독립선언의 라용균(1895-1984, 25), 3·1운동 등에 참여한 정일형(1904-1982, 5)이 있다.
 
유석현은 광복회 회장을 맡았던 관계로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유석현은 의열단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활약 중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자 같은 해 11월 만주로 건너가 1920년 7월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유석현은 1923년 5월 의열단의 제2차 거사 때 북경에서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000매 등을 김시현·황 옥·김지섭 등과 함께 몰래 들여와 거사를 추진하던 중 밀고자에 의해 1923년 3월 15일 붙잡혔다. 유석현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는데, 만기 출옥하여 194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라용균은 일본 유학시절 1919년 3·1 독립선언 직전에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2·8독립선언의 주도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1923년 1월에 열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했던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는 주비회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해방 이후 제헌의원이기도 했던 라용균은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하였고, 6대 국회에서는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라용균의 호를 따서 매년 시상하는 '백봉신사상'은 현역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상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정일형은 1919년 2월 평양 광성학교 2학년 재학시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평양경찰서에 붙잡혔으나 당시 만 15세의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7일 만에 출감했다. 1937년 10월에는 평양지방 감리교 기독청년연합회 회장을 지낼 당시 안창호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이 빌미가 돼 유언비어 유포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출감했고, 곧이어 흥사단 사건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연이어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강제에 저항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1942년 1월 서울에서 이동욱·안흥국·한익수와 함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등 국제정세를 논의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는데,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여 1944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결기간 중 이미 2년 3개월간 수감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해방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걸은 정일형은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82년 사망과 함께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부인 이태영이 1998년 별세하면서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합장되었다. 이태영은 '동작민주올레 시즌1'의 <여성길>에서 이미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서 눈에 다소 거슬리는 장면이 확인된다. 독립운동가 라용균의 묘 바로 오른 편에 나란히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준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독립운동가 유석현의 묘 바로 왼편에는 만주국군 중위를 지낸 최치환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교부장관과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은 2009년에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한 인물이고, 최치환은 비록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음에도 엄연히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국군 중위까지 오른 인물이다(관련 기사: 독립유공자 심사를 친일파가? 연세대 학생들은 알까).
 
이들의 생각이나 활동이 결코 가깝지 않았을 텐데 독립운동가 라용균의 묘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준의 묘, 독립운동가 유석현의 묘와 친일인사 최치환의 묘 사이의 거리는 채 1m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우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물론 일부러 이런 식으로 묏자리를 배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1980년대 우리 사회 주류의 역사의식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제 시대가 바뀌어 국립현충원에 서려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렇듯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현실은 친일파묘의 이장을 가능케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의 시급성을 극적으로 웅변하는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국가유공자 제2묘역, 위아래로 위치한 친일파의 묘와 독립운동가의 묘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 바로 위쪽에 있는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제공한 인물로 유명한 김홍일(1898-1980, 10)과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이범석(1900-1972, 1), 민립대학건립운동과 신간회의 조만식(1883-1950, 11), 미주방면 외교운동에 헌신한 이원순(1893-1993, 4)과 임병직(1893-1976, 6),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 3) 등이 안장되어 있다.
 
김홍일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폭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1931년부터 상하이에서 병기창 주임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평북 용천 출신의 김홍일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부터였다. 만주와 연해주, 중국 관내를 누빈 김홍일은 중국군 장교로 소장까지 올랐고, 사단급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을 맡았다. 해방 이후 1948년부터 참여한 국군에서 중장까지 올라 오성장군(五星將軍)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1960-70년대는 야당의 정치지도자로도 활약하였고, 1977년부터는 3년간 광복회 회장도 역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범석은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에서 제2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제2지대는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공동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부대였다.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국내진공작전은 추진되지 못했는데, 실제로는 일제가 항복한 지 3일 후인 1945년 8월  이범석을 필두로 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정진대원을 태운 비행기가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완강한 저항으로 중국으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이들이 보여준 주도적 국권쟁취 의지는 길이길이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다.
조만식은 해방이후까지 주로 평양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조직 책임자로 활동하다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1922년 7월 평양에서 기독교청년회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1923년 1월 21일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고 각 지방에도 지회가 연이어 설치되는 등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11월에는 이상재를 대표로 하고 조만식 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발기하여 교육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발기하고, 신간회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12월 13일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
 
1943년에는 일제가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면서 협조를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한국 청년들의 징병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일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고, 6·25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원순은 1914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박용만 단장의 비서 겸 재무담당 직책을 맡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8년 박용만이 베이징에서 암살된 뒤에는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하여 외교활동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193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제2행서의 재무위원에 임명되어 하와이에서 인구세, 애국의연금 등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뒷받침하였다. 1937년에 베이징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생한 직후 대일전에 총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단합회, 애국단 등을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할 때, 이원순은 이승만과 함께 동지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1년에는 민족대단결, 독립전선 역량 집중, 광복대업 촉성 등을 목적으로 해외한족대회준비회가 결성되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동지회 중앙부 대표로 참가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워싱턴에 주재하며 대미 외교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을 계속하였다.
 
이원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이기도 한데, 이원순의 체부동 한옥집은 1962년 김대중-이희호의 결혼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
 
임병직은 1913년 이승만의 알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대학에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그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고,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서재필 등 재미교포들이 재미한인대회를 개최할 때 서기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방략 토의를 주도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상하이를 출발하여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펴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한시대·김병연·송철 등과 집행부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고, 1942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맹호대, 사령관 김용성)가 조직되었을 때는 선전과 참위로 참여하였다. 임병직은 8·15 해방 이후에도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영화 <말모이>로 다시 주목 받은 한글학자 주시경에 대한 이야기는 동작민주올레 시즌1 <평화·통일길>에서 소개한 바 있어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그런데 김홍일 장군의 묘와 조만식의 묘 바로 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제5대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의 묘와 애국가의 작곡가이지만 친일 음악으로 논란이 된 안익태의 묘가 각각 자리 잡고 있어 눈에 거슬린다(관련 기사: '친일' 안익태 국립묘지 안장된 날, 눈에 띈 박정희 행보).

위 아래로 친일파의 묘와 독립운동가의 묘가 자리 잡으면서 마치 조진만의 묘가 김홍일장군의 묘를, 안익태의 묘가 조만식의 묘를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위 아래로 배치된 묏자리가 참으로 고약하게 다가온다.

앞에서 살펴본 국가유공자 제1묘역이나 이곳 국가유공자 제2묘역이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의 시급성을 이렇듯 극적으로 웅변하고 있음에도, 국회가 아직도 적극 호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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