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판사는 안 된다'는 이승만... 그의 황당무계 논리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19-12-18 10:12     조회 : 679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0131 (315)

'여성 판사는 안 된다'는 이승만... 그의 황당무계 논리
[동작민주올레 54]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 서울현충원 여성길④
[오마이뉴스 김학규 기자]

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 ?서울현충원 여성길
국가유공자묘역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안보·과학 분야에서 국가 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몸 바친 국가유공자를 모신 곳으로 제1, 제2, 제3묘역으로 나뉘어 조성돼 있다. 이곳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는 총 68위의 국가유공자 중 이태영 박사, 김현숙과 이영희 등 3위의 여성이 안장돼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1914-1998)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는 '이태영 박사·정일형 박사 묘'가 있다.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으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인습에 맞서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함께 안장돼 있는 남편 정일형(1904~1982)은 2~8대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권한대행을 역임한 야당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1919년 평양 광성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 참여는 물론 재미유학생회, 흥사단, 수양동우회 등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해 총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이태영은 평양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평양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정일형 박사와 결혼했다.
 
이태영에게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결혼 이후 감옥에 간 남편 정일형의 옥바라지를 위해 삯바느질에 누비이불장수, 행상을 하면서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태영이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처음으로 얻는 것은 여성도 법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1946년 네 자녀를 둔 서른둘의 나이에 여성 최초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6년 뒤인 1952년에는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여성 최초의 판사'라는 지위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여자는 아직 시기상조이니 가당치 않다"는 쪽지를 붙여 이태영의 임용을 거부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시보 이태영이 당시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에게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김병로가 이승만을 면담해 설득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야당집 마누라를 판사 자리에 앉혀 놓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있던 정일형의 아내라는 점이 중요한 임용거부 사유였던 것이다.
 
결국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는 2년 뒤인 1954년 판사에 임용된 황윤석(1929~1961)으로 남게 되었다.
이태영은 남녀간의 불평등을 가정에서부터 개혁하기 위해 변호사로 개업한 1952년부터 각종 청원과 진정 등을 통해 가족법개정운동을 시작했다. 195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여성문제연구원 부설기관으로 세웠다. 불우하고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법률구조기관인 이 상담소는 1966년 8월에는 (사)가정법률상담소로 발전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인권기관이 됐다. 197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다시 이름을 바꿔 공익법인으로 거듭났다.
 
이태영이 시작한 가족법개정운동은 1989년에는 이혼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고,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까지 인정하도록 하는 결실을 봤다. 2005년에는 호주제 폐지로 이어졌다.
 
이태영은 1969년 55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3∼1971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법정대 교수 겸 학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태영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광풍에 맞서는 민주회복 국민선언(1974. 11. 27.), 3.1 민주구국선언(1974. 3. 1.)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여성계를 대표해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세계여성법률가협회 부회장(1958~1971)을 맡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도 보여줬다.

그가 1971년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을 비롯해 막사이사이상(1975), 유네스코 인권교육상(1982), 세계감리교 평화상(1984), 국민훈장 무궁화장(1990) 등을 연이어 수상한 데에는 여성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 등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무던히도 높았던 이태영은 여든한 살인 1995년에야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직을 마치고 퇴임했다.
 
이태영은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과 <한국이혼연구>(1969), <북한의 여성생활>과 <여성으로 태어나서>(1991),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등의 저서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