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일평생 항일·민주화 동지로 산 정일형-이태영 부부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05-07 17:39     조회 :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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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케네디, 루스벨트, 애덤스, 부시, 태프트….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명가다. 우리나라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 없을까. 뉴시스는 한국의 정치명가 기획기사 일곱 번째로 정일형 전 의원 일가편을 게재한다.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금연(錦淵) 정일형 전 의원(1904~1982년)과 이태영 박사(1914년∼1998년)는 평생을 항일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바친 동지이자 부부였다.

진주 정씨의 일원인 금연은 황해도 안악군 장연면 저도리에서 의병대장 정원모의 손자이자 선비 정기찬(鄭基贊)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항일의식을 키우며 자랐다.

3·1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광성고보 학생이던 그는 평양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주동학생으로 몰려 평양 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됐다.

몇 개월 후에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배달하다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됐고,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방면될 수 있었다.

광성고보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에 진학한 그는 일부 친일교수에 대한 배척운동을 벌이다가 1년간 정학을 당했고, 이 기간 동안 야학에서 한 강의의 내용이 문제돼 다시 1개월간 구류됐다.

이후 그는 감리교 연회에서 시행하는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 1929년 3월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서 학사를, 시라큐스대학에서 종교교육 석사를, 드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36년 귀국했다.

귀국한 후에도 그의 항일정신은 식지 않았다. 금연은 1936년 4월 빈 창고에서 개척교회를 열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연사로 나오는 특별강연회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다시 투옥됐다.

금연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서전 ‘오직 한 길로’에서 “도산 선생을 찾아 왜경의 탄압과 방해가 극심하다고 보고를 했지만 도산 선생은 강연회를 강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며 “이 강연은 도산 선생의 마지막 강연이 되고 말았고, 강연회를 주최했던 나는 왜경의 문초와 투옥을 감수해야 했다”고 밝혔다.

이 무렵 금연은 이태영 박사를 처음 만났다. 금연과 당시 이화여전에 다니고 있던 이태영 박사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처음 알게 됐고, 이 박사가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인 1936년 평양 정의고녀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축사를 맡았다.

금연은 이 박사와 결혼한 후 서울의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하지만 1938년 흥사단과 관련된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1940년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서대문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금연은 이에 대해 자서전에 서 “매일 한 번씩 비행기 태우기와 물먹이기 고문에 의해 몸을 가눌 수 없게 됐다”고 회고했다.

일제는 광복 직전까지도 금연에 대한 고문과 협박을 계속했고, 급기야는 ‘1944년 정일형 사건’을 밝혀야 한다는 구실로 이 박사에게도 고문을 가했다.

금연은 자서전에서 “왜경이 고함과 공갈·협박·회유 등의 방법을 썼으나 만만치 않자 여자의 본능적인 수치심을 악랄하게 이용했다”며 “아내는 치가 떨리는 자들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 보여야 했다”고 밝혔다.

 금연은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봄 무죄언도를 받고 풀려났고, 이후 중앙정부 연락위원, 과도정부 인사행정처장(행정자치부에 해당), 물자행정처장, UN총회 한국대표 등을 지냈다.

금연은 광복 직후 아내인 이 박사에게 “기다리던 세월이 왔으니 평생 소원하던 법률공부를 하라”고 제안했고, 이 박사는 194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 1952년에 여성 고등고시 1호 합격자가 됐다.

이 박사는 야당 의원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나라의 첫 여성 변호사가 됐다. 그는 1952년부터 가족법개정운동을 주도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여성권익신장운동에 주력했다.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냈다.

금연은 1950년 서울 중구를 선거구로 선택해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국회의원을 연이어 지내며 1977년 아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에게 선거구를 물려줄 때까지 무려 8선(選)에 성공했다.

금연은 이승만 정권 당시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민주당을 창당했고, 1961년 박정희 정권의 5·16군사정변 당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금연과 이 박사는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운동’을 함께 주도했고, 1777년 ‘명동성당 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돼 나란히 국회의원직과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

금연은 자서전에서 “아내는 남편인 내 걱정만 했고, 나 역시 아내 걱정만 했다”며 “하지만 우리 부부의 자격상실이나 직위 박탈보다 더 섭섭한 것은 사법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걸고 있던 희미한 기대마저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금연은 1982년 4월23일 서울 봉원동 자택에서 별세,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고 이태영 박사 역시 1998년 12월17일 봉원동 자택에서 별세, 정일형 전 의원과 같은 묘역에 합장됐다.

1944년생인 아들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은 서울대 법대를 거쳐 미국 미주리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현숙 전 국회의원의 딸인 김덕신씨와 결혼했다.

그는 9대, 10대, 13대, 14대,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당 최고위원·고문, 국민회의 부총재, 통합민주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송원영 전 신민당 원내총무는 ‘정대철, 유난히 큰 배꼽’이라는 기고문에서 “정일형 박사는 한없이 유순하고 매사에 양보하는 형이었다”며 “그렇게 선비 같던 분이 유신 말기에는 의정단상에서 유신의 부당함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송 원내총무는 “폭력 행사를 충성처럼 경쟁하던 그 시절, 젊은 여당 의원들로부터 늑골이 부러지도록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급기야는 국회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됐다”며 “1976년 3월1일 이른바 3·1 민주 구국선언 사건에 야당을 대표해서 서명을 했다가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그 곤욕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일로 정 박사가 맡았던 서울 중구가 비게 됐고 당시 여당이었던 장기영 의원이 비슷한 시기에 타계해 보궐선거를 치르게 됐다”며 “그런데 놀랍게도 정 박사의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절대적인 성원으로 정 박사의 외아들 대철 군이 9대 국회에 당당히 등단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1978년 10월 정기국회 때 초선인 정대철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을 신청해 ‘현 정권은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퇴진할 용의가 없는가’라며 (박정희) 정권 퇴진 문제를 꺼내고 말았다”며 “당시 김용태 공화당 총무 등 강경파들은 분을 못 이겨 ‘저것도 제 아비 간 길로 가게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밝혔다.

정 고문의 장남 정호준씨 역시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민주당 서울 중구위원장을 지내며 정치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금연의 가문인 진주 정씨는 ‘삼국유사’에서 전해지는 신라 6촌 중 자산진지촌의 촌장 지백호의 후손들이다. 진주 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명을 포함,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던 정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경상도관찰사 정경세, 성종 때 효행과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정성근, 숙종 때의 문신 정필달 등이다.

pjy@newsis.com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46호(10월10일자)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