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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형 (鄭一亨) 1904 ~ 1982
정일형 박사는!
본관 진주
금연(錦淵)
활동분야 [前]정무직 공무원, [前]국회의원
출생지 황해도
주요경력 중앙신학교 우암재단(현 강남대학교) 초대 이사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당수권한대행
외무부장관
주요수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건국훈장 애국장

 

대동강이 흘러내려 서해에 합류하는 진남포(鎭南浦) 앞 제섬 부근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도 안악군 장연면 저도리인데 부친 정기찬과 모친 하은총 여사의 3대 독자로 출생,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일찍이 진남포 삼존학교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정일형은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성경과 찬송가를 배웠다. 

이후 집성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어서 수안 공립 보통학교와 삼숭 학교를 거쳐 평양 광성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교회의 종지기 등으로 생활하면서 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27년 3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에서 근무했으며 2년 뒤인 1929년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평양 여자 고등성경학교 사범과를 졸업 하고 진남포의 덕동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리고 뉴욕대학 신학과와 오번대학교 종교 교육과와 드루대학교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정일형은 1935년 동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구국 후 신리교회에 담임하였다.  그는 평양 근로자들이 많은 공장지대에 신리교회를 개척하여 이곳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감리교총리원에서 주최하는 금강산 외금강 수양회 강사로 갔다. 

여기서 이태영을 만나 1936년 그녀와 결혼하였고, 1937년부터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그리고 감리교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 등 배일사상의 선도자라는 죄목으로 1940년 일경에 체포되어 해방 전까지 5년 동안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0월 미군정청 주둔 후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문자행정처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일 과도정부의 인상행정 처장 및 물자행정처장으로 일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특사단 부사로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독립 사실을 주지시켰고, 그 해 10월에는 제 3찬 파리 UN 총회의 한국 대표로 참가. UN의 한국 독립 승인을 획득했다. 

1949년 국제 연합한국협회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되고 1950년에는 대한 통신사(UPI)사장에 선임되었다. 

1951년 제 6차 UN총회에 CKAR, 한국 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그 해 제 2대 국회의원으로 (중구 을) 피선,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국회 외무원 원장 및 간사로 의정 외교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1954년 범야 민주세력을 단합, 창립한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민주당 서울시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투쟁했으며 1959년 5월에는 국회 언론 탄압재책위원해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ㆍ19 의거 후 제 2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 5대 국회의원(중구 을)이 되는 동시에 내각에서는 수석 국무위원으로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1년 필리핀 아담슨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3년 민주당 재건에 관여했고 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관한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7년 신민당고문, 이듬해 신민당 부총재가 외었다.  특히 이때부터 박정희정권의 독재 견제와 민주 투쟁에 혼신을 다. 고 이에 따라 많은 활동의 제약과 위협을 다.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선봉에 서서 정면투쟁을 계속했다. 

1969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고, 그 해 국토 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신민당선거대책본부장으로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1974년 신민당 고문에 추대되고, 이듬해 통일연구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3·1)명동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의원직은 물론 공민권까지 박탈당했다.  그 동안 정치활동 이외에도 각종 국제단체와 YWCA, MRA등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했으며 1973년 6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성서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10ㆍ26사태 이후 복권 조치 되었고, 1981년 5월에는 모교인 미국 드루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와 국민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힘써 살아가세요” 이 말은 1982년 4월23일, 한 평생 우직하게 “오직 한 길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정일형 박사가 78세를 마감으로 운명하면서 아내와 가족에게 남긴 유언이다.  이 말은 그가 한 평생 살아오면서 가슴 속에 지녔던 삶의 지표였다. 

정일형 박사는 교회와 국민과 민주주의와 통일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정일형 박사의 마지막 투쟁이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그리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투쟁과 희생은 국민을 위한 봉사 정신에서 가능한 것이고 그러한 희생과 봉사는 그가 교회를 통해 체득한 종교적 신념과 가치였다.  정일형 박사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해방, 정의와 평등을 척박한 사회, 정치 현실에 구현하려 노력하였고 그 모든 것을 ‘거룩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1982년 4월23일 서거, 사회장 및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고,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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