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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 젊은 시절을 뉴욕 한인 교회에서 보낸 나는 유학시절의 추억을 젖을 때마다 오늘도 새로운 보람을 반추하고는 한다. 나의 뉴욕 한인교회 시절은 실제로는 역경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역경의 미덕은 인내였으니만큼 나는 그 과정을 통하여 내가 한 인생으로 설 수 있는 황금의 복음을 찾을 수 있었다. 한 신앙인으로서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1927년에 나는 연전(延傳) 문과를 졸업하고 곧 월간지 신생사(新生社)에 들어가 근 2년 동안 노산 이은상(李殷相)과 같이 기자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의 갖은 탄압과 제한 속에서 잡지를 편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대 모험이요, 위험한 수난의 연속이었다.
편집 중 약간이라도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을 다룬다거나, 오식만 조금 있어도 편집 책인 나를 곧 소환하여 2~3일 내지 7일까지 구류를 시키기도 했다. 특히 종로 경찰서와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매일같이 우리 편집실을 감시하고 감독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고난과 감시 속에서도 우리는 <한국의 얼과 정신> 을 젊은 세대에게 전해야 했고, 그것만이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와 역사적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근 2년 동안이나 종교 교육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신생지> 에서 근무하고 활약하면서도 미국유학의 꿈을 줄곧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잡지사에서 나오는 내 수입의 일부를 떼어 누이동생을 공부시킨 다음 지금은 고인이 된 신형(信亨)이의 이전 (梨傳)보육과 졸업 한 주일을 앞두고 꿈에도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먼저 서울서 일본 요꼬하마까지 배로 가서, 거기서 다시 미국 상선 월슨(Wilson)호에 몸을 싣고 만경창파 태평양을 항해하여 근 1개월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천사 도에 일단 억류되었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일본 여행권엔 나의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민국에서는 나를 코리안(Korean)을 취급하고 일본인 수용소와 격리하여 독방에다 수용 했다. 공교롭게도 그 해에는 괴질의 전염병이 널리 나돌아 외항선박에 대하여는 철저한 검역과 조사를 하였다. 그래서 나의 상륙도 1주일 후에야 겨우 허용되었다. 그렇게도 그리던 미국 땅, 그러나 낯선 이국 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침 <신한민보> 주필 고 백일규 선생이 달려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듯 한 기쁨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모르는 나를 그분의 알선으로 양주훈선생 부부의 지도를 받아 시카고를 경유하여 오하이오 웨슬리 안에서 1년간 공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6월에야 푸른 꿈을 달래며 겨우 뉴욕에 가게 되었다.

내 청춘시절의 푸른 꿈과 시련에 찬 고난의 삶은 이곳 뉴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 대공황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나 우리 한인 중심의 교회도 경제적 혼란이 막심하였고, 웨슬리안 신학생 일동이 뉴욕한인교회 기속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뉴욕에 있는 우리 동포는 겨우 1백여 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만남과 사교는 지극히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엄습한 경제적 곤란과 취직난까지 겹쳐 각자의 생활은 너나할것 없이 궁핍하였던 만큼 누구 하나 우리를 따뜻이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급한 김에 김도연· 허 정· 장덕수 등을 찾아가 봤지만 그들 역시 극도의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후배를 돌보기커녕 처음에 반갑게 만나려고도 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컬럼비아 대학 부근에 있는 한인교회 기숙기사의 작은방 하나를 빌려 쓰기로 했다.
그런데 뉴욕교회는 1921년12월 피치버그에서 열린장로교 대회에 참석하였던 임종순 목사가 뉴욕에 와서 전도한 결과가 그 설립의 기초였다.

1922년 에 감리교회 선교부를 교섭하고, 다음해 선교부의 보조와 일반 동포들의 특연으로 서 21 스트릿에다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동년 4월23일에 헌당식을 거행한 것이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의 첫 예배당이었다. 그 후 1927년 10월에 다시 서115 스트릿에 있는 4층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이전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뉴욕한인교회가 된 줄 안다.

특히 뉴욕시에는 우리 동포가 많긴하였으나 오래 거주하는 사람은 소수였고, 대개 유학생이나 노동을 위해 임시로 와 있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에 교인수의 증감은 심했지만 사교와 연락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내가 한인교회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당시 유니온 신앙대학에 재학 중인 정태진씨가 임시 목사로 목회 중이었고 신도 수는 20~30명에 불과했다.

그때 교회에 자주 나오던 사람들은 오천석·김도연·황창하·김활란·박인덕·김마리아 등이 있고, 그 외에도 장석영·한승인 등도 교회 참석자의 멤버들이었다.

그 무렵 뉴욕 부근에서 유학을 하며 지도자적 역할을 하던 분들은 <삼일신보> 를 경영하던 허정·김도연·장덕수를 비롯하여 이기붕·허진업·이철원·한승인 등과 여성 지도자로 김마리아·김활란·서은숙·박은혜·박인덕·캐덜린 김 등이었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 갈 때는 신문학을 하겠다고 갔었지만 가는 해부터 전례없는 공항으로 우리들의 공부는 대단히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어학마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신문학을 뒤로 미루고 종교 교육학을 배우기로 했다. 생활이 고달프다고 우울할 때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자주 만나 서로 위로하고 사랑과 인정을 나누면서 친목과 단결을 기하는 한편 신앙심을 돈독히 다져 나갔다.

돈이 떨어져서 아침으로 우유 한 병과 빵 몇 조각으로 지내는 날이 허다했지만, 이따금 냉면을 해 놓고 파티를 벌려 서로를 위로하던 그 시절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스쳐간다.

30평 내외가 될까 말까한 교회당, 1주에 5불짜리 기숙사 방이긴 했으나, 멀리 대서양쪽 허드슨 강을 향해 의자에 앉아 원대한 꿈을 꾸던 만 3개년의 생활은 여러 가지 희비애락을 남기게 했다.

당시의 기숙사 생활은 음식을 따로 팔고 있었는데 정태진 씨가 목사일 을 그만 두고 윤병구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터는 윤 부인이 직접 음식을 해 주어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비록 경제공황으로 인해 우리 한인들의 생활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긴 하였으나 뉴욕 한인교회를 중심하여 배우고 생각하며 뜻을 다져 갔으며, 나의 귀중한 청년기가 곧 그러했다.

뉴욕 한인교회에 머무는 동안 비록 경제적인 사정으로 도미 유학의 원래 목적인 신문학은 공부하지못했으나 나의 신앙생활과 인격수련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
그리스도의 참된 생활의 고달픔을 달래가며, 참된 삶과 인생의 가치 및 진리탐구에 몸부림치 기도했다.
내가 금주와 단연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나는 우선 뉴욕 신학대학 종교교육학과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정태진 목사가 연희전문의 동문이었고, 동시에 유니온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인 터라 매일같이 저녁이면 조국광복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투쟁할 것을 맹세하며 눈물로서 그 뜻을 간구하였다.

뉴욕 한인교회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센터로 만들기 위하여 주일날이면 예배를 보고, 또한 시간을 빌려 학생들을 심방하며, 직업과 돈이 없어 그야말로 사선에서 방황하는 학생동지들을 모아 가벼운 주머니를 몽땅 털다시피 하여 빵과 우유를 사다놓고 먹고 마시며 위로와 격려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 뉴욕한인교회에서는 여름마다 모여드는 각지 유학생을 상대로 각종 환영회와 사교모임을 주선할 뿐만 아니라 직업 알선까지도 도맡다시피 하여 나라 잃고 망망대해에 타국에서 나그네된 설음과 향수를 달래가며, 후일의 조국광복을 위해 힘껏 일하자는 큰뜻과 생각을 같이 하자는 수련회도 갖곤 했다.

특히 이시기에 나의 동창생이기도 한 김마리아여사는 그 인자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보살핌으로 많은 유학생들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여름방학만 되면 학생들 주최로 하기 학생대회가 연중행사처럼 있었는데, 연사로는 주로 이승만, 서재필, 스코필드박사 등이었고, 때로는 컬럼비아 대학교수로 있던 H· 홈도 왔을 뿐 아니라 언더우드박사까지 왔었으며, 그들의 강연은 지금까지 속에 생생히 떠오른다.
스코필드 박사는 강연을 통해「비록 한민족은 일본인들의 가혹하고도 혹독한 지배하에 있는 피압박 민족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조국도 주권이 회복되어 동양에서 빛나는 부강한 나라가 형성될 것이다.」라고 우리를 격려해 마지않았다.

「한국민족은 일본민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어학을 일본사람과 한국 사람에게 가르쳐 보았더니 한국 사람이 월등히 우수했다. 수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도 언젠가는 자주독립 국가로 되어 한민족의 천재적 소질을 발휘할 기회가 틀림없이 도래할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 잘해서 당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제정세도 돌고 도느니 만큼 틀림없이 너희 나라는 독립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한민족의 우월성을 들어 침체되어 가는 조국광복의 꿈을 한껏 북돋아 주면서 거듭하여 말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은 너희 조상들의 잘못으로 일본에게 침략당해 이렇게 보잘것없는 식민지가 되었지만 여기 나와 있는 학생들을 보면 굉장히 똑똑해 보인다. 확실히 주권을 되찾을 것이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서재필 박사는 「한국 사람들은 한강 백사장의 모래알과 같다. 깨끗하고 매끄럽긴 하지만 한가지 못하는 게 있다. 그것은 단결심이 부족한 것이다. 백사장의 매끄라운모래알도 시멘트가 들어가 엉키어 굳어져야 제 몫을 하는 거와 같이 우리도 협력하고 협동해서 단결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희망이고 소망이다.」고 학생들 간의 상호협동과 단결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주로 정치적인 강연을 많이 했다고 기억된다.
아울러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이 세계일주 여행후 뉴욕에 왔을 때도 뉴욕 한인교회에서 환영회를 가졌으며, 그를 통해 고국의 실정을 듣고 깊은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재미 생활 중 나는 한편으로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즉 1932년에 드류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35년에 영광의 Ph.D를 받앗다.

그리고 펠톤과 업 두 교수의 친절한 지도와 교수를 받으며 3년간의 대학원생활 중 응분의 학생회 간부로서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본다. 그 몇 가지를 들면 이러하다.

첫째,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주간지 <삼일신문> 을 발행하고, 둘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백일규 선생이 편집장으로 있는 주간지 <신한민보> 에 학생신분으로 입사하여 미국 동부 특파원으로 임명을 받아 기사와 편집에 참여했다. 그리고 특히 나로서는 <풍차의 노래> 라는 칼럼의 매주 집필자가 되어 이 난을 통해서 정견과 시사및 사회문제를 다루는 한편 조선 총독부의 만행을 고발 · 비판하는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이순신등과 같은 유명한 애국지사와 도산 안창호 · 이승만등 과거와 현재의 주인공들을 소개하여 재미한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또 한인 유학생 잡지 <우라키 Rocky> 의 편집자 으로서 한승인 · 장세연 · 변영로· 김세선 등과 더불어 원고를 수집하여 고국에 있는 주요한에게 위촉하여 인쇄 · 발행되었지만 거기까지의 고초는 이루말할수 없었다.

원고의 절반 이상이 총독부의 검열과정에서 삭제된 상태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문책과 아울러 과분한 격려의 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검열 과정을 사실대로 말해주지 못하는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우락키> 제6호다. 그 많은 원고를 한인교회의 조그만 방에서 정리 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러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필요한 자금조달에도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으며, 최대의 고심을 해 왔었다.

그 밖에도 나는 여름방학이면 한인교회를 위해 몇사람의 친지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어 커어튼을 사다가 예배당을 깨끗이 하고 전등 깨진 것을 바꾸기도하고, 페인트를 사다가 한주일 이상 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단장된 예배당에서 동지들과 함께 기념예배를 볼 때의 즐거운 심정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추억이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김마리아 · 서은숙 · 김활란, 그리고 한승인 · 오천석 등과 함께 성글을 공연하며 재미 한인동포들과 교인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키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뉴욕 한인교회에는 나에게 있어서 민족의 얼과 정신을 고취하고 키운 수련장이었고, 돈독한 신앙심과 장래의 큰 뜻을 세우던 입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때문에 망국의 설움을 안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우리 한국 교포를 위해서 무언가일을 좀 해 보겠다는 뜻으로 <신한민보> 미국 동부특파원으로 활약했고, 다른 유학생들은 공부와 연애를 병행하는 이가 많았으나 나는 오직 한 길로만 나아가야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공부에만 치중하는 한편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다짐했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윤산온 (尹山溫, Gorge McSune) 목사와 김도연제씨와 같이 3 · 1 정신으로 우리들의 장래를 계획하고 협력하던 결연장이요, 수도장이 그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젊은이의 토론과 담론이 수 없이 벌어지고 희로애락이 교차됐다.

그러나 학창시절이 끝나고 내가 가야할 곳은 역시 나를 낳고 나를 길러 준 내 조국 한국 땅 뿐이었다. 학위를 받은 후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도록 권유도 많이 받아 왔고, 백인계여자 동창생들의 결혼청탁 내지는 미국 내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유혹도 많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권유와 달콤한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혈혈단신인 내가 주권도 잃어버린 암담하기 만한 나의 조국을 되찾게 한 것도 역시 뉴욕한인 교회에서 길러진 애국심과 애향심의 결과요, 거기에서 발견한 인생의 진가 때문인 셈이다.

6년 동안의 재미생활 도중 그토록 많은 애환과 역경을 물리치고, 깊은 신앙생활을 명상을 가지게 했던 뉴욕한인교회, 학생의 신분으로써 수년간이나 <신한민보> 의 한 칼럼인 <풍차의 노래> 를 집필한 것도 한인교회에서 얻어진 내 인생의 소산이었다. 이와 같은 뉴욕한인교회에서 임시 목사직을 맡고 있던 정태진씨가 퇴임하고 후임으로 부임한 윤병구 목사님은 자신이 스스로 젊은 유학생들과 친교하고 지도하면서 교회 확장에 앞장섰다.

그는 틈만 있으면 외국 유학생 초대 만찬회에서 자주 참석하여 한국을 인식시키고, 알리는 데에 힘썼다. 지금도 뉴욕 버펠로우에서 개최된 세계 외국 유학생 친선 대외에 참석하여 찍은 <우락키> 제6호에 실려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컬럼비아 문전에서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필자와 더불어 김도연 · 한증인 · 이철원 · 김세선 · 노재명 · 김마리아 · 이묘묵 · 임창영 · 문재린 · 김영민등 10여명의 재미 유학생들과 나란히 기념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내 인생의 청춘기인 32세까지 뉴욕한인교회를 중심하여 나의 온 정력을 다 바쳤다. 크리스챤의 인격을 함양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육계와 정치계에서 줄 곳 활동할 수 있는 자원인 민주교육의 정신을 터득할 수 있던 그 시기야말로 내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1년전 본 의원이 김대중 씨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원의 소행이라고 밝힐 때 여당의원 여러분께서는 이 자리에서 고함을 지르고 책상을 두드리고 마이크를 꺼버리고 회의안을 삭제하고 본 의원을 규탄하는 소란으로 인해 발언이 중단되었고 또한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제명 문제까지 거론되었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놀랍게도 본 의원의 발언내용이 옳다는 것을 박정희 대통령께서 뒤늦게 인정했다는 사실이 잭앤더슨 기자와의 회견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본 의원이 재기한 문제들, 즉 첫째로 범인들을 체포하지 않은 이유, 둘째로 일본의 주권침해문제와 김씨의 원상회복문제, 셋째로 김씨에 대한 과도한 감시문제, 넷째로 외국기자 이외의 출입금지와 한국인의 접견금지문제, 다섯째로 괴문서 침입과 협박전화 등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김 총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해명을 듣고 싶습니다.

의원 여러분! 서두에서 본인과 관련된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이유는 여당 원은 여러분께서 늘 또다시 본 의원의 지리의 중 불유쾌한 대목이 있을지라도 자중해 주실 것을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작년 그때처럼 집권 여당이 다수의 횡포를 자행할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상황인 반면에 우리 야당은 그때처럼 국민 대중의 냉대 속에서 곤궁한 입장에 빠져 있는 허약한 당이 아니라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국민 대중과 함께 역사의 개혁과 창조를 위해 앞장서 싸울 수 있는 본연의 야당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의원 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당면과제는 무엇보다도...(삭제)...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민주회복을 위한 헌법개정에 있습니다.
국민적 열망이 요원의 불길처럼 치솟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정치인들이 해야 할 과제와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축하며 안보와 통일의 명분을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 앞에 탱크를 진주시켜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를 동결시키고 야당인사를 비롯한 모든 비판세력을 대량 구금한 가운데...(삭제)...대통령 1인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소위 유신헌법을 창조해서 10월 사태를 일으킨 것부터가 민주국가에서...(삭제)...이었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정치적 후진국가로 전락하여 국내 및 국제적으로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없는 단절된 상황 속에서 그토록 비정상적 강력수단을 총동원해서 소위 유신체제를 통과시킨 현정권이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조지 오월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삭제)...구사하는 데서부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 것입니다.

국가의 반공과 안전보장을 위해 신설했다는 대통령의 긴급 정치권이 엉뚱하게 헌법의 비민주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민주인사를 평화적 활동을 봉쇄시켰고 그들을 구속, 탄압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는가 하면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삭제)...되었습니다.

의원동지 여러분! 헌법이란 그 사회의 정치상황을 법규범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그 내용이 맞는 정치상황이 달라진 때는 그 형식이 되는 법도 현실에 맞도록 고쳐야 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하는 정설입니다. ???이와 같은 상식적 논리를 입버릇처럼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몇 년 전 3선 개헌 당시의 정부와 여당의원들이었습니다. 그때 유명한 법률학자 출신이며 집권당의 실력자로서 3선 개헌안의 제안자인 그분이 바로 이 자리에서 법이란 글자는 물 수(水)변에 갈 거(去)자로서 글자 그대로 물처럼 변하는 속성을 가졌다고 갈파했던 사실을 본 의원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마음대로 뜯어 고치면서 주권자인 국민은 한 자도 고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고치자는 말만 해도 감옥에 처넣고 15년 징역, 무기징역, 사형 등을 거침없이 선고한 처사야말로 현대의 비극이요, 모순이요, 이 헌법이 누구를 위한 헌법인가를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대학생들이 소위...(삭제)...저항할 조짐이 있다고 해서, 세칭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됐다고 해서 수천 명의 대학생을 연행해서 구타하고 고문했는가 하면 그 가운데 200여명을 꽁꽁 얼어붙은 감옥에 가두어 놓고 군사재판이라는 참극을 연출하고 있는 현 정권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돈독한 우리 국민을 이끌어 갈 진정한 국민정부가 아님을 자백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어린 대학생들을 상대로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죄 없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처벌하며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 정권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 정권 인권탄압상을 보고서야 어찌 우리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바랄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이 현실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론과 현상이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뿐입니까? 무자비하게 구속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가차 없이 탄압하고 전국적으로 교문을 닫게 하고 학교당국을 위협하는 한편 사태수습에 노력하는 교수들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간악한 바리새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정부가 바로 현 정부가 아닙니까?

또한 의로운 세상을 가르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님들까지 감옥에 가둔 이들이 바로 현 정권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진정한 발전과 번영을 위해 싸우고 활동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인을 정치권으로 다스리고 제압하려 하는 기관도 현 정부가 아니냐 그 말씀입니다.

추운 겨울날 감옥에 갇혀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구속자 가족들의 모임에도 수많은 기관원들이 투입되고 기동경찰까지 동원하는 것이 바로 현 정부가 아니라고 부인만 하시겠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현직교수를 고문하여 죽게 만든 것도 정부 기관이요, 피의자를 변호하는 변호사를 구속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살펴 준 변호사의 자격을 박탈하여 하고 자기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교수들을 파면하고 순수한 신앙과 종교 신념에서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외국인 선교사 7명에게 추방을 기도하는 기관원들이 바로 우리 정부의 요원이 아닙니까?

어디 그것뿐입니까? 근로자가 자기의 권익보호를 위한 자구행위에 대해 기업주보다 더욱 무섭고 간섭하고 탄압하는 노사문제도 전국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으며 일반 국민의...(삭제)...기구가 바로 유신 체제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본 의원은 여기서 유신 체제에 대한 어떤 형태의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일부 몰지각한 인사가 자기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현행 헌법을 고치자고 선동하는 것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박정희 씨에게 진정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현행 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일부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국민서명운동 즉 개헌운동을 방해하지 않을 용의가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묻고자 합니다.

전국 대학은 물론 일부 고등학교까지도 휴교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태의 원인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근 100만 명의 천주교도들과 300만 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연일 기도하면서 인권과 민주회복을 선언하였고 교수 문인을 비롯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현 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유린에 대하여 투쟁하는가 하면 각계각층 인사들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해서 개헌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해외동포들까지도 이 역사적 과업과 투쟁대열에 참가하여 국내외에서 마치 가마솥처럼 들끓고 있는데 아직도 일부 인사의 소행이라고만 믿는다고 하면 얼마나 더 많은 수의 국민이 현 정권 정치권력에 항쟁하여 개헌지지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말입니까?

옛 시인은 오동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도 천하에 가을이 왔다고 읊었습니다.

만일 대통령께서 아직도 현 체제의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의 수효와 또한 그 열망도를 모른다면 궁색하나마 이제라도 객관적 평가를 통해 공평무사하다고 인정하는 인사들로 하여금 공개된 자리에서 그들의 견해를 피력하도록 하면 아마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원 동지 여러분! 본 의원은 여기서 지엽적인 문제로 장황하게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본 의원은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우리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적으로 개선, 개혁하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올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오늘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결자해지의 원리대로 박정희 대통령 자신뿐입니다.

우리 국회와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는 힘이 없고 무용 지물 시 되는 현실에 빠져 있습니다.

유신 헌법의 발단도 박 대통령 때문이며...(삭제)...따라서 문제 해결도 박정희씨에게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본 의원은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선배의 입장에서 세상의 권세를 누릴 만큼...(삭제)...허심탄회하게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고 싶은 충정에서 몇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우선 박정희씨가 금과옥조로 강조하는 통일과 안보를, 안정과 총화론의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헌법 개정과 안보문제의 총론만 말씀드려야 하는 당내 약속이 있기 때문에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5.16당시 민주당 정권이 국가의 안정 보장을 위태롭게 했다고 해서 아홉 달 된 민주당 정권을 군사혁명으로 타도한 장본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안보 문제가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님을 입증 할 수 있는 증인이 바로 그 분입니다.

그 후 대통령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할 때에도 우리의 안보 때문에 스스로 천명한 혁명공약까지도 번복한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은 통일과 안보를 이유로 해서 헌법의 3선 금지조항을 뜯어 고쳤고 혼란이냐 안정이냐 하는 식의 안보 논쟁을 국민투표에 부친 바도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10월 사태를 일으켰고 그나마 당초에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유신 헌법이라더니 이제 와서는 북한 남침 야욕에 대응할 수 있는 안보와 방위를 위하여 유일한 법체계가 유신 체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13년 동안 우리국민이 안보 때문이라면 박 대통령의 어떠한 요구도 거역하지 않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협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야당 역시 안보 문제라면 당을 초월해서 도와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보가 문제일 뿐 아니라 오히려 날이 갈수록 안보가 위험해진다면 도대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침략적인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이미 4반세기 전부터 존재해왔고 한반도의 주변 정세는 언제나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와 같은 객관적 상황은 어제 오늘 생긴 것도 아니요, 그 변천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모든 권력을 쥐고 전 국민의 아낌없는 협력을 받고서도 이제 와서 국가의 안보가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지 묻고 싶습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정부 여당의 주장에 따른다 해도 안보의 성패는 누가 대통령이냐 하는 데 있다는 말씀인데, 다시 말하면 박 대통령이 계속해서 유임해야 북한이 남침하지 못한다는 논리인데 이 점에 있어 본 의원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남북한의 대결이란 김일성과 박 대통령의 대결이 될 수 없으며 또한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해야 김일성이 남침하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이라도 있다는 말인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왜 대통령과 우리의 안보 문제가 운명을 같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직도 대통령은 사사건건 안보를 구실로 국민에게 끊임없는 인내와 복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포드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가 우리 국가의 안보와 방위를 확약한 오늘에 사태는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 국민을 그만 괴롭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국민의 투철한 반공 의식은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고 세계 자유 우방에서도 공인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청학련 사건의주범자가 공산주의자요, 정부 발표대로 그 사건에 연루된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용공 분자라고 한다면 우리 국민은 그 사태의 책임을 들어 현 정권의 퇴진을 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나간 13년 동안의 우리 국민 가운데 용공 분자가 증가했다면 박 대통령도 그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들이 실제 용공 분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비판 세력을 매카시적 수단으로 몰아세운 정치권력의 희생자라 한다면 그 책임 또한 정부가 면할 수 없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삭제)...새삼 안보 운운하여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의 희생이나 협력을 요구할 자격이나 능력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안보 안보 하는데 안보합시다. 말로만 하는 안보 말고 정말 안보합시다. 독재가 아니면 안보가 안 됩니까?
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보가 안 된다고 합디까?
보세요. 미국이나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잘하니까 안보가 안 된다고 그럽디까?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야 안보가 제대로 되는 거야!
안정과 총화해야 안보가 되는데 독재만이 총화 방법이라는 그런 방정식도 있습니까?
강요된 치욕이 총화라는 말입니까? 총화도 민주주의 해야 총화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 6.25동란 이후 우리의 안보는 미국과의 협력을 주축으로 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때문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인 닉슨 독트린과 그 변화의 조짐이 보일 때 우리 국민이 예의 주시해 왔고 정부도 또한 그 점에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정부가 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온갖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군원의 심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심지어는 포드 대통령의 방한까지도 우리의 안보 문제에 직결시켜 해석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보에 있어 미국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인권 문제와 결부해서 경제적 협력도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할진대 오늘날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는 어떤 산태에 빠졌느냐, 한마디로 최악의 상태예요. 극한상황인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 국민 때문입니까? 야당 때문입니까? 아니면 일부 인사 때문입니까?
그 원인이 현 정권의 인권 탄압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안보를 핑계로 별짓을 다해가면서 우리의 안보를 위한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강조하는 야당 인사들…그들을 사대주의의 근성이 남았다고 비판을 일삼는데 그래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협력 관계를 악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사대주의라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안보를 위해 전통적인 한미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자는 우리 주장이 사대주의인지 따져보자는 말입니다. 한미와 한일관계가 안보의 요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정부는 우리의 안보를 악화시킨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범국민적, 거당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속 타결한 한일회담타결 때만 하더라도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한반도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이제 와서는 우리의 안보는 미국이나 일본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 말은 바로 우리가 해 온 말입니다.

또한 7·4 공동성명이나 6·25선언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가져 올 역사적 선언이라고 자화자찬할 때 본 의원은 한사코 반대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안보 문제라고 해서 우리 야당이 혼연히 호응하고 성원할 때 유독 본 의원은 그 불가능성과 김일성 정권을 사실상 시인하는 것이며 통일도 요원해진다는 점에서 당론을 어기면서 반대할 사실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와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연년세세 김일성의 남침가능성이 놓아졌다는 정부의 변덕과 선전을 누가 믿을 수 있다 는 말입니까?

7·4 공동성명이나 6·25선언으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통일이 이룩된다고 장담한 그 말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이제 와서 남침할 가능성이 놓아진다는 선전이 거짓말이든 결국 두 가지 말들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엉터리가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살펴보아도 군인 출신인 …(삭제)…자기의 전공 분야인 안보 문제조차도 허점을 거듭해 왔으니 더 이상 그에게 우리 국가의 안보를 맡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본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에 항상 안보를 강조하고 안보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불식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바로 그 안보 때문에 궁지에 몰리고 그 안보를 담당하는 능력의 한계를 보이는 근본적 원인이 …(삭제)…안보에 관한 개념이 잘못 설정됨에 연유 되었다고 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자유중국을 구경하고 왔습니다. 저는 세계적으로 시비도 있지만 장기석 총통을 존경하며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하나님과 사랑의 소리를 듣고자 하며 그 생활이 검소하고 겸허한 태도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금문도에 거의 매일같이 적군의 포화가 그칠 날이 없으나 그 분은 국민을 안도시키며 생업에 힘써 경제 부흥을 시켜 오늘의 복된 대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결코 불안과 공포심에 떨게 하지 않았으며 안보 문제로 인해 위협과 공갈도 하지 않았습니다. 민심의 동요를 사지 않으려고 노력함을 보고 왔습니다.

안보란 결국 국가의 3대 요소인 주권, 국토, 그리고 국민의 안전 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국토의 방위만이 안보의 전부인 양 잘못 인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국가에서는 주권이나 국토의 안보에 앞서 국민의 안보에 중점을 두어야 결국 그로부터 국가의 주권이 확립되어 나아가 국가의 영토를 지킬 수 있는 완전한 안보 태세가 정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외국에서도 국민을 무시하여 자기의 독선적 통치방식에 무조건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지도자들이 아무리 국민 총화를 외쳐도 먼저 독재자여 물러가라 독재자가 물러나야 국민 총화가 된다고 항변하는 것이 현대 민주국가들의 기본자세요, 긍지임을 최근의 이디오피아와 희랍에서 표시된 바가 있습니다.

본 의원은 우리 국민이야말로 그러한 자세와 태도를 이미 여러 차례 실증해 보인 수준 높은 민주 국가임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국민에 대하여 한없는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된 바도 있지만 우리 국민은 건국 이후 최악의 비상 사태였던 6·25동란 중에서도 선거를 치렀습니다. 민권 보장도 소홀히 하지 않은 위대한 민주 국민입니다.

비록 당시도 본 의원은 현역의원으로서 직접 관여한 바도 있습니다만 6·25 동란의 전화가 치열하던 1950년9월 17일 국회에 제출한 ‘부역행위 특별처리번안’, ‘사형금지법안’ 그리고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중 개정 법률안’ 이런 것들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상도 불구하고 우리 국회가 또 다시 가결시켰던 것입니다.

그 암담한 전시 중에도 민권의 침해를 거부한 우리 국민인데 항차 오늘 이 전도의 긴장 상태를 가지고 민권의 침해를 자행하려는 현 정부에게 저항하는 민주 국민들을 몰지각한 일부 인사라고 규정합니다. 하나 우리 국민들이 기록해 놓은 찬연한 민권의 역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쪽이 몰지각한 인사들이 아니고 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보는 항상 국민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정부 때문에 위태해 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위원 동지 여러분 ! 본 의원은 박 대통령에게 간곡히 충고하고자 합니다. 진정으로 이 늙은 사람의 간청입니다.

본 의원은 70을 넘긴 고령입니다.
어느 날 천수를 다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인입니다. 앞으로 저의 여생이 남았다면 얼마나 더 남아있겠습니까? 저는 일찍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숱한 고난의 환경도 겪었지만 그런대로 수십 년 의정 생활을 하며 세계 각국의 왕후장상도 만나 보았고 미력하나마 국가 민족을 위하여 보장된 일에도 참여해 본 사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개인적 욕망을 가질 것도 없고 가져보아야 소용없는 나이로서 세상이 험난하지 않았다면 이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노정객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김 총리! 김 총리! 유한한 한 생명의 인간이 어찌 무한한 생명의 역사를 다스리려 하십니까?

유한한 지혜의 인간이 어찌 무한한 활력의 자유를 유린하고자 합니까?

유한한 능력의 인간이 무한한 변화의 안보를 혼자서만 감당하려 하십니까?

이제 본 의원은 우리 세대 모두가 경험한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따라서 본 의원은 13년이 지난 오늘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5·16혁명을 주도하여 역사의 앞장에 섰던 그때의 심경 그대로 이제 역사의 뒷전에 물러앉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또 한 번 내려야 할 시점에 왔다고 믿습니다.
(장내 소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벤 구리온 수상이 지금은 은퇴해서 저 산간벽지에서 손수 트랙터를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바로 그 순간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일할 결심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 의원은 우리 젊은이들도 저 경북 선산 땅에서 쟁기질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모든 젊은이의 지표가 될 것이요,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 사람도 더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바로 참다운 국민 혁명의 불길이 치솟아 안정과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한 국민 총화가 자연스럽게 이룩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본 의원이 마지막 정치적 소망이 있다면 그동안 어려운 시대에 어려운 나라 살림을 맡아 장기간 수고하신 박정희 씨가 국민의 뜨거운 박수 속에서 떠나는 날이 바로 저에게 있어서는 의정생활에서 물러나는 역사적순간이 돈다면 참으로 더없는 축복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대통령께서 저의 충정을 깊이 살펴주시기를 바라면서 끝으로 몇 가지 개정 및 안보에 관한 질의를 총리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김 총리에게 질의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민주역량이 충분한 우리 국민은…(삭제)…국민의 위력보다도 체제의 위력에 의존함으로써 …(삭제)…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는데 …(삭제)…
(장내 소란)없다면 총리가 진언할 용의는 있으신지?
(장내 소란)둘째 현행 헌법은
(장내 소란)(12시 58분 산회됨)
(1974년 12월 14일 90회 본회 17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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