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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형 박사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금의환향하였지만 그 당시 미국 유학자들에게 ‘피난처’와 같았던 연희전문학교 교수라는 진로를 포기하고 민중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일선에 나서서 억눌려 지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일”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정일형 박사는 그러한 ‘종교적 독립운동’의 실천현장으로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에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낙후된 ‘신리’지역으로 정했다.  청년 목회자와 청년회원들이 주도하는 신리교회는 ‘청년교회’로 유명세를 탔다.  정일형박사의 지도를 받은 신리교회 청년들은 사회적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위해 선교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어린이 성경학교와 야학교 외에 유치원도 설립하였고, 정일형박사는 종종 곤경에 처한 지역 주민들의 상담자로, 문제 해결사로 나섰다. 

정일형 박사는 첫 목회지 신리구역에서 만난 교인과 주민들이 겪고 있는 가난과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구도자가 가야 할 ‘좁은길’,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이 무엇인지 깨달아갔다.  정일형박사는 미국 유학시절 논문 지도교수였던 펠턴의 방한을 맞아 그의 집회 설교와 강연 통역을 하고 지방교회와 농촌 현장 답사에 동행하면서 교수충원이 필요한 감리신학교에 교수자리를 제안받고 1937년 가을부터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게 되면서 교수활동을 시작하였다. 

정일형박사는 펠턴이 기독교 농촌운동 지도자의 모델로 제시한 킹슬리를 한국교회에 소개하면서 신학교에서 양성하는 교역자들이 킹슬리처럼 열악한 농촌으로 들어가 도탄에 처한 민중을 구제하는데 앞장서 주기를 기대하였다. 

정박사는 목회든, 신학이든 그것이 건강 하려면 교회가 처한, 그리고 교회를위하여 봉사할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에 근거해야만 한다.  생각했으며, 민중이 처한 현실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목회가 되어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목회가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예배나 설교에서 그치지 않고 야학이나 농촌계몽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운동으로까지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특히, 경제적, 문화적 풍요를 즐기는 도시보다,  문명과 격리된 열악한 환경에서 보수적 종교인습과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농어촌이야말로 전도와 선교의 우선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중일전쟁(1937년)을 계기로 모든 정치와 사회, 종교와 문화 질서를 ‘전시체제’로 바꾸고 ‘총동원’, ‘총후보국’, ‘멸사봉공’, ‘전시동원’ 등의 표어를 구사하며 한반도의 후방기지화를 꾀하고 있었다.  전쟁을 위한 지원병, 징병제도가 실시되면서 청년 학생들은 불안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일형박사는 신학교를 “이 산하 구령사업의 총본산“으로, 신학생들을 ”멸사봉공하려고 구령사업에 나서는 젊은 용사“로 표현하였다.  직설적 표현이 불가능했던 당시 상황에서 일본을 향해 은유적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일형박사의 ‘은유적’ 비판과 희롱은 종말론적 상황이 심화되면서 ‘노골적’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정박사는 당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치 상황’ 으로 보았다.  이러한 ‘좌우대립’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평화와 인류의 공존공생“을 구현하는 일은 무력으로 남의 나라, 민족을 침공하고 지배하는 힘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의인도’를 궁극적으로 가치로 삼는 종교적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보았다. 

정일형 박사의 주된 목회적 관심은 미래를 책임질 청년에 있었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신앙적 소명이었다.  실제로 박사는 자신이 선포한 ‘십자가’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일제말기 암울한 민족현실을 살아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시절 많은 번역서와 강연, 글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정일형박사의 신념있는 행동을 곱게 보지 않았던 일본은 각종 시국사건의 배후인물로 정일형박사를 지목하며 연행과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런 중에도 한국교회 상황은 더욱 암담한 현실로 바꾸어 갔다.  교단 안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정춘수 감독을 중심으로 한 ‘혁신교단’ 지도부는 기독교 전통 신앙과 민족적 양심에 반하여 지나칠 정도로 ‘친일’ 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혁신교단’의 반역 행위에 대하여 이윤영, 유형기, 양주삼, 이규갑, 송흥국, 문창모, 마경일 등이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정일형 박사도 일경의 감시를 받는 상태에서도 여기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결국 뜻을 다하지 못하고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유치장의 열악한 환경이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매일같이 각혈을 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1943년 병 보석으로 풀려나 평양 연합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1944년 9월 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서야 5년여에 걸친 투옥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풀려났어도 완전한 자유의 몸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경찰의 감시 하에 행동의 자유를 제약 받았다.  총독부 측으로부터 계속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1945년 4월, 처가가 있는 평북 북진으로 가서 사람 왕래가 없는 딴 살림채에 구석방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자진 ‘유배생활’을 택한 셈이다. 

철학박사를 가진 목사였지만 그에겐 지킬 교회도, 돌볼 교인, 가르칠 학생도 없었다.  가족만이 정박사의 유일한 교인이고 학생이었다.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족예배를 보았다.  언제나 아침식사 때면, ‘우리가 갈아둔 칼에 녹이 슬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나는 큰 소리로 기도하고는 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밝은 세상이 오긴 하겠지. 녹이 슬지만 않으면 갈아둔 이 칼을 한 번 쓸데가 있을거야...’ 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

그리고 4개월 만에 그의 기도와 소원이 이루어졌다.  해방의 소식과 함께 ‘녹술지 않게 갈아둔 칼’을 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해방 후 준비했던 칼을 휘두르며 가야 했던 길은 역시 ‘좁고 험한 길’ 이었다.  해방 후 월남하여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이 되어 건국의 기틀을 잡는 것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정부특사로 국제연맹(UN) 총회에 참석, 한국의 독립 승인을 얻은 일, ‘정치 1번지’ 인 서울 중구에서 8선 국회의원으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가치를 구현한 일, 제2공화국 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일,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당을 재건한 후 1977년 삼일절 구국선언을 주도하여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마지막 투옥의 시련을 겪기 까지 “함께 걸어오던 많은 사람들이 밝고 따뜻한 길, 그리고 평탄해서 걷기 쉬운 길을 찾아 떠날 때도 묵묵히 ...미욱하고 바보스럽다.  말을 들으면서도 오직 한 길”만 고집했던 정박사였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협문(狹門)의 길’ ,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던 골고다의  길이었다. 

                                                                     정 일 형

금연(錦淵) 정일형(鄭一亨)박사는 목사보다. 정치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해방직후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을 시작으로 1498년 정부 수립 후 유엔 특사로 활양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을 이끌어 냈고 1950년 5월 제 2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 1973년 9대 총선까지 최장수 8선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60년 4ㆍ19 학생혁명을 수립된 장면 정부에서 잠시 외무부장관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나 박정희의 광화당, 유신정권하에서 독재와 부패를 규탄, 견제하는 야당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정일형박사는 한국 정치사에서 야당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일반인들에게 '야당 정치인'으로 각인되어 있는 박사가 사실은 감리교회 목사였고, 신학교 교수였다.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정일형은 대동강 입구, 진남포 앞에 있는 작은 섬(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저도)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잃고 진남포로 옮겨 감리교 계통인 삼존학교와 삼숭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평양 광성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3학년 때 삼일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1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농촌계몽운동을 해나갔다.  '불온' 연설을 한 혐의로 다시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2년 동안 미감리회 종교교육협회 간사, 기독교 잡지 <신생> 기자로 일했으며  1929년 2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뉴욕대학을 거쳐 1935년 6월 뉴저지 드루대학 대학원에서 "미국 남부 농촌사회 조직체 유형" 이란 논문으로 박사(Ph.D)학위를 받았다. 

그 해 9월 귀국하자 모교인 연희 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일선에 나서서 억눌려 지친 민중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평양 신리 공장지대에 교회를 개척, 목회를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사람이 공장 건물을 빌려 개척교회를 한다는  소식은 교계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자 목회' 2년 만에 그는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파송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은사였던 빌링스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감리교신학교에서 그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일형은 1937년 9월부터 김리교 신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안식년을 맞아 서울에 온 드루대학 지도교수 펠튼(R.A. Felton) 박사와 공동으로 <농촌교회 독본>(1938. 감리교신학교 출판부)을 집필하였다. 

정일형 교수는 계속해서 감신 기관지 <신학세계>에  "웨슬레의 생애"(1938 .5), "우리 교회의 급무"(1939.2), "성지의 기독교운동"(1939 .2), "조선감리교회 교육자료"(1939. 6), "기독교와 종교단체법"(1939 .9), "이상적 청춘기업"(1939.12), "심해의 복음"(1940. 3), "종교의 역할"(1940.5) 등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939년 5월 서무연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학문과 교육적 관심은 복음의 현실적용, 특히 피폐한 조국 현실을 부흥시킬 목회자 양성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강의와 설교는 언제나 '민족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1938년 1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40년 봄, 소위 '감신삐라 사건'이 터졌을 때 배후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3개월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결국 감신은 그해 10월 폐교되었고 이 때부터 그의 유랑과 투옥생활이 시작되었다.  신병치료차 일본 교토에 갔다.  헌병대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된 후 '친일파' 혁신교단을 반대하였다.  이유로 다.  체포되어 긴 옥고를 치렀다. 

이는 그 시대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 이었다.  그가 '감신삐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직후 <신학세계>(1940. 8)에 실은 마지막 설교, "느헤미야의 소명의식"은 고난의 마지막 시대를 사는 예언자의 각오를 담고 있다. 

"영달한 애국청년 느헤미아는 폐허된 고원(故園)의 문화가 조각돌이 된 것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거이외다.  간곡한 기도를 드리기 무릇 사흘을 지날 때 성국왕명(聖國王命)이 마음 바다.  뚜렷이 나타납니다.  '내 제단을 쌓아라.' 는 분부와 명령을 열혈 애국지사의 심혼을 이글이글 태우고야 말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어전대명을 배수(拜受)하였으니 일의전념(一意傳念) 그 실현에 멸사봉공(滅私奉公)하리라. 마침내 그 소명의식의 신념과 신앙도 불타고야 말았습니다. "

                                                                                                     (이덕주 감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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