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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이승만정권은 1948년 집권한 이래 정상적인 민주 정치에는 관심이 적고, 오직 정권을 끝없이 연장하기 위하여 아첨꾼들을 모아 놓고 수준 이하의 정치 연극을 연출하기에 급급해 있었다.

부산 정치파동에 이어 54년 11·29의 이른바 사사 오입 개헌 파동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하나의 큰 오점이었고, 동시에 쓰라린 치욕이었다. 법을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상식마저 묵살해버린 전대미문의 횡포였는데 이러한 집권자의 독단을 방관할 수 없어서 정일형박사를 비롯한 뜻있는 지사들이 호헌준법의 기치를 들고 ‘호헌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54년 12월1일 전문 17조로 된 규약을 통과시키고 원내 교섭단체로 출발한 호헌 동지회는 민주정치를 추진하며 헌법의 정당한 운용을 기함에 있었으며, 민주 헌정의 기본원리가 이 땅에서도 실현되길 갈망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담은 신당발기를 위한 초석이었다.

1954년 11월27일 사사오입 개헌파동에서 태동한 호헌 동지회, 그 후 7인 위원회, 18인 위원회, 그리고 9인 위원회의 활동을 통하여 온갖 장애와 난관을 물리치고 신당 작업을 추진해 온 신당 발기 준비위원회의 노력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민주수호’의 역사적 사명을 띤 민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내각 책임제로 구김살 없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민주 이념과 관료 독재를 배격하여 정치 질서의 혁신을 이룩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정일형박사는 언론탄압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나치즘적 언론 정책을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창당된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왕조적 전단(傳斷) 정치는 계속되었다. 5.26 부산 정치 파동을 비롯하여 사사 오입 개언 파동 그리고 24보안법 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영구 집권의 야욕에 혈안이 되었던 이승만 정권은 1960년3월15일에 실시되는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최후 발악적인 폭거를 자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꽃다운 학생들이 총궐기를 하였고, 4월26일에는 대학교수단이 침묵의 데모를 진행하면서 결국 이승만정권이 막을 내리고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에 대한 국민 일반의 기대가 너무도 크고 성급했으며, 거기에 민주당은 신·구파로 나뉘어 국내외적으로 신망을 잃으면서 무능내각이라는 평판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가장 민주적인 체제와 제도로 민주적 방식에 의해 자라나던 제2공화국은 극히 치욕스런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 5.16으로 정권을 빼앗긴 뒤 정일형박사는 정정법-정치정화법(政淨法)에 묶여 연금생활을 당했다. 신문과 라디오 청취도 일절 금지되었고, 외부인의 출입 또한 엄중히 제한되었다.

1963년 정정법에서 풀리고 5선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다시 국회로 나갈 수 있었으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관한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정일형 박사는 의원직 사퇴를 결행했던 의원들과 함께 선명 야당의 기치를 들고 신한당을 창당했으나 힘있는 대정부 투쟁을 위해 민중 · 신한 양당의 통합에 힘을 모아 신민당을 발족시켰다. 정박사는 신민당 후보로 중구에서 당선, 6선의원이 되었고 신민당 부총재로 피선되었다. 1969년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독재의 망령을 둘러싸고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1967년 총선 이후부터 정가에서 거론되어 온 대통령을 위한 3선 개헌 문제가 69년 정초부터 양성화되었다. 박정희정권이 독재정권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69년 9월9일 3선 개헌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정일형 박사는 전국 유세와 국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3선 개헌을 가열차게 반대하였다. 다음은 1969년 8월18일 국회 본회의에서의 정일형 박사의 3선 개헌반대 발언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씨, 집권 8년 동안 숱한 구호와 선전으로 국민을 농락해왔고 자기네들만의 세기말적 향락을 누리고도 모자라 마침내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써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박 정권의 3선 개헌을 예상해왔지만, 그러한 슬픈 예상이 하나의 예상으로만 그치기를 기대해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는 결코 몇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수백년 동안의 피의 항쟁을 통한 경험의 소산이요, 인간 이지(理智)의 발현입니다. 전쟁에서 작전 계획을 수립하듯 민주주의를 계획하여 오던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라는 오명과 함께 역사의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 갔습니다. ..(중략)...지금 이 자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 3선 금지 문제는 어떤 논리와 결론이 아니라 차츰차츰 발전해 온 민주 역사의 가르침이요, 그 교훈이 우리로 하여금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논리가 되는 것이올시다.

상황에 따라 민주주의의 원칙을 외면하거나 민주 헌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면 우리는 진작 민주주의를 포기했어야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국토를 잃고, 이북 동포들은 일제와 같은 상황속에서 (....) 우리는 민주주의를 채택했고, 국토와 동포 대신에 민주주의를 지켰고, 6·25 동란때에는 많은 인명과 재산을 상실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킨 그 이유를 민주주의를 더욱 더욱 발전시켜야 할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중단하거나 변조시킬 수는 없다고 우리들이 확신한 까닭입니다.

본 의원은 3선 개헌을 결사 반대합니다. 우리는 박정희씨가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 때문에 잃은 이북땅과 동포, 그리고 6·25 때에 잃은 인명과 재산보다는 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민주주의 원리를 어기면서까지 박정희씨가 계속 집권을 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하 생략)”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정일형박사는 윤보선, 백낙준, 이인, 유진오, 정화암 등과 함께 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를 발족시켰다. 이후 정박사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문동환, 함세웅, 이문영, 신현봉, 이해동, 서남동, 안병무, 문정현, 윤반웅, 이우정 등과 함께 1976년 3. 1절을 기하여 ‘민주 구국 선언’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해 또다시 연행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때 정일형박사는 그의 부인 이태영박사와 함께 7년 징역에 7년 자격정지가 구형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살하게 되었고 이태영박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였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1977년 3월22일 국회의원직 박탈 이틀 후인 24일 정일형박사는 국회에서 고별인사를 마지막으로 8선의 의정활동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정일형박사의 민주화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그가 죽는 날까지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였다.

명동 하늘을 울린 12人의 弔

경향 신문에 실린 3ㆍ1민주구국선언 사건의 글이다 .
우리나라 민주주의 큰 획을 그은 사건!!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 여명이 모여 3.1 운동 57주년 기념 미사를 올렸다.

늘 그럿듯이 미사는 경건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지행되었다. 평소와 다른것이 있다면 맨 마지막 순서로 키가 작고 한 없이 온순해 보이는 이우정이 다소 긴 성명서를 낭동했다는 것이다.

침착하고 또랑또랑한 그녀의 발언을 끝으로 평온한 가운데 신. 구교 합동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러나 이 평범한 미사는 열흘 후 서울지검 검사장 서정각이 ‘일부 재야 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 규정하고 관련자 20여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하면서 대형 사건으로 커지고 말았다. 문제가 된 ‘민주구국선언서’는 3.1운동 57주년을 맞는 비장한 감회와 허울만 남은 민주주의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세 가지 주장을 담고 있다.

 민주 구국 선언

1.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사이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의회정치의 회복과 사법권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2. 두 번째로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이다. 민족 통일의 첩경은 국민의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며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온건하게 확인한 이 성명이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76년 2월 19일 오후 서울 수유리 안병무의 집에 문익환.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이 모였다. 이들은 유신통치에 저항하는 교수들을 합법적으로 해직할 수 있는 조치엿던 교수 재임용 제도에 걸려 전해에 한신대, 고려대.이화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각기 해직된 처지였다. 이때 문익환은 성서공화로부터 위임받은 신.구약성서 공동 번역의 막중한 임무에 골몰하던 중이었다.

그는 히브리어에 정통한 신학자이며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75년 8월 17일 절친한 벗 정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장준하의 사진을 책상 위에 두고 지냈는데, 3.1절을 앞두고 원통하게 숨진 것이 분명한 벗의 음성을 아침 저녁으로 듣게 된다. 장준하가 살아있으면 무엇을 하자고 했을까?

문익환은 3.1정신을 되새기고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기로 하고 그 초안을 갖고 안병문의 집 모임을 주선한 것이다. 그는 이우정에게 전 대통령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와 이태영을 여성대표로 서명을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김대중은 이들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3.1절 선언서를 준비하고 이태영의 남편이자 국회의원인 정일형에게 서명을 권유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문익환 등과 함께하게 된다.

2월 26일 이들은 다시 모여 서명권유 대상자들 중에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는 박형규. 성서번역의 임무를 맡은 문익환 등은 빼기로 합의한다.

이리하여 최종 서명자는 함석현.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등 12명이었다.

이 성명서는 문익환의 장남 문호근이 필경하여 한빛교회 목사 이해동이 등사했다. 이를 낭독하기 좋게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의 특유의 궁제 붓글씨로 서서 이우정에게 건내 주었던 것이다.

3월 2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날의 명동성당 선언문 소식을 접한 박정희는 노발대발했다. 그날 저녁부터 관련자들은 모두 중앙정보부가 ‘한성무역’이라는 위장 옥호를 내건 안가로 연행되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제외하고 모두 조사를 받았다. 함석현. 정일형은 70세 이상 고령이라 하여, 김승훈. 장덕필. 안충석 등 신부들은 직접 가담자가 아니라 하여, 이우정은 여자라 하여 불구속 처리되었다. 결국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반웅. 신헌봉. 문정현. 문동환. 함세웅. 이해동 11명은 구속기소되었으며, 77년 3월 22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다.

불구속 피고인 함석현은 재판 때마다 법정에 감베 상복을 입고 나왔다. 이에 호응하느라 신부 신헌봉은 판사가 피고인 이름을 부를라치면‘ 아이고 아이고’곡을 하면서 앞줄로 달려나갔다. 놀란 판사에게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한국의 인원과 민주주의를 죽어서 곡을 합니다요”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달변과 정연한 논리를 비롯해 해직 교수와 목사, 신부들의 유신통치를 향한 항변은 법정을 ‘민주주의 강의실’로 만들었다.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무린 암흑기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파하는 신부와 목사들은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신독재를 재판하는 모습이였다. 변호인측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재판부에 항의해 변호인단이 사임한 가운데 재판부는 76년 8월 29일 문익환. 김대중 등에게 유신헌법을 비방하고 그 폐지를 선동한 죄 8년 징역을 선고한다. 한번의 서명의로 5선 의원 정일형은 의원직을 잃는다.

법정의 피고인들만큼 위풍당당하고 늠름했던 것은 그들의 가족이었다. 긴급조치의 굴레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었다. 가족들은 구속된지 54일만에야 첫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재판이 있는 날이면 다른 모든 재판이 중단된채 법원 청사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법정을 기관원들로 가득 채우고 한 가족당 5장의 방청권을 발행하는 것에 항의하여 가족들은 공개재판을 요구하며 방청권을 불사르는가 하면, 갖가지 소품을 고안하여 중앙청, 덕수궁, 법정 앞을 가리지 않고 유격대적인 소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한복 유니폼을 통일해서 입고 ‘공개재판’ 이라는 선명히 쓰인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거나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쓰인 양산을 받쳐 든 이들의 모습은 자주 외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기관원들의 미행 감시를 따돌리는 절묘한 기지를 발휘하는 이 겁 없는 여성들에게 긴급조치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적이되 명백히 긴급조치 위반인 시위는 길어야 20분을 넘기지 못했다. 출동한 경찰은 이들을 경찰차에 태우고 서울 외곽 한적한 교외에다 부려 놓았다. 전직 대학 교수인 이우정도,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도 기꺼이 경찰차에 실려 을씨년스러운 교외 벌판에 버려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문익환 등은 평소 일면식도 없던 김대중과 조우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과 재야 지식인을 연결시킨 최초의 고리로 , 이들의 인연은 국민의 정부 탄생 때가지 지속된다. 4년 후 ‘김대중 내란음모’라는 신군부의 터무니없는 조작극의 희생양으로 이들 전원이 기약없는 감옥을 살게 되는 것도 이 때의 인연 때문이다.

김대중은 푸른 조수복 왼 가슴에 수인번호 6888호를 달고 징역살이를 시작한다. 구치소는 그가 늘 복용하는 관절약을 소지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쓸쓸한 그의 심정을 간파한 35세 젊은 신부 함세웅은 포켓 안의 작은 성경을 김대중에게 건내준다

이런 함세웅에게 이문영이 슬그머니 농담을 날린다. 구치소 임감 절차를 끝내고 담요와 식기 등을 안고 긴 복도를 걸어 각자의 방에 들어가는 중에 온종일 똥냄새가 진동하고 오물투성이 취들이 운동회를 하는 천장에 반대 자국이 번들번들한 방이 기다리는 줄 모르고 ‘이거 꼭 공항 대합실 같네요. 신부님 안그래요? 함께 가다가 각각 다른 탑승구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감옥은 신앙의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추위를 몹시 타는 함세웅은 병약한 노모가 영치해 준 담요을 끌어안으면서 비로소 성모 마리아의 고통 세상 모든 어머니와 자녀 간 사랑의 관계를 깊이 체득한다. 평생 독신이어야 하는 신부는 그것이 감옥만이 줄 수 있는 영성임을 깨닫는다.

신학 교수인 문동환과 안병무는 감옥에서 민중신학의 터전을 닦는다. 그들은 종교의 벽, 학문의 벽, 지식인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취조실, 고문실, 김방, 세상 한복판 그 어느곳이든 그곳이 사제와 목자의 자리임을 체득한다.

직계 가족에 한해 한달에 한번만 허용되는 면회, 그나마 면회실 내 감시는 극심했다. 더러 전달되지 않는 편지 등 독재정권의 협량하고 비인도적인 처우는 끝없이 이어졌다. 고난의 와중에서도 그들은 변호사 접견 시에 동행한 타인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포옹하고 더러 뽀뽀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당황하는 교도관에게 문동환의 미국인 부인 문혜림은 태연하게 되묻는다. “뽀뽀는 내가 하는데 왜 아저씨 얼굴이 빨개지나요?”

그녀는 훗날 불우한 기지촌 여성을 위한 공동체 ‘두레방’을 설립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터지는 감옥 안에서 문익환은 ‘꿈을 비는 마음’에 충만한 시인으로 탄생한다. 그는 어린 날 북간동 명동촌 친구였던 윤동주의 정결하고 따뜻한 시 세계에 완전하게 다가선다. 감옥은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 태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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