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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이듬해 초가을 정박사가 도산 안 창호 선생의 강연을 주관한 이유로 경찰에 잡혀간 이후 10년간은 항일운동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데 바쳤다.
이태영 박사님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이불장사를 했다. 염색 하면서 그 독한 냄새 때문에 천식이 생겼고, 이 때 얻은 병으로 봄 가을엔 심한 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가위의 날이 잘 들지 않아 다친 엄지손가락은 뒤로 휘어진 채로 변해버렸고 검지와 중지도 휘어져 버렸다. 이때의 소원은 법학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좋은 가위를 갖는 것이었다.

해방 후 정 박사는 그가 유엔 특사로 외국에 갈 때마다 선물을 꼭 하나 사왔는데 그것은 바로 가위였다. 잘 드는 가위 하나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내의 옛 소망을 그렇게나마 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 모은 가위가 200개가 넘었다.

간난신고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법학 공부에 대한 갈망은 늘 가슴에 품고 지낸 이태영 박사님에게, 정일형 박사님은 법학공부를 권유하며 해방 이듬해인 46년 만학의 나이인 32세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다. 그는 그때 네 아이의 엄마였다.
쉬는 시간이면 남의 눈길을 피해 아이의 젖을 먹이고 다시 수업에 들어가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그런 뼈를 깍는 노력 끝에 고등 고시 사법과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의 합격 뒤에는 여자 아이라도 공부를 하고 싶어하면 끝까지 공부를 시킨 어머니, 꿈을 심어 준 큰 오빠 아내의 공부를 위해 방까지 따로 마련해 준 남편 정일형이 있었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것은 전적으로 이태영 박사님의 투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그가 야당 인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법원과 검찰에서 함께 실무 수습을 하던 동기생들은 모두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으나, 그만 유독 그 대상에서 빠진 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는 하늘의 배려였을까? 이태영 박사님은 불우한 여성들과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한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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