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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자 이태영 박사님의 표현대로 ‘법과 인습에 눌려 우는 여성들이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이를 계기로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이날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태영 박사님의 오랜 꿈을 실현시키는 그 정도의 첫걸음을 내 딛는 날이기 때문이다.
상담소에서는 법률 상담은 물론, 가정문제의 화해, 조정과 함께 법적으로 해결하는데 필요한 대서와 소송도 무료로 맡아서 해 주었다.
1950년대의 가족법은 헌법의 남녀평등 조항을 무색하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태영 박사님이 법률 상담을 한다고 해도 법이 이것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 한계는 명백하였다.
이태영 박사님은 민법 개정 운동을 하기 위해 YWCA를 비롯 대한여자국민당, 대한부인회, 여학사협회, 여성문제연구소등 9개 단체가 모여 진정서를 작성 각계 요로에 보내었다.
진정서는 정 광현 박사의 지도로 남자만의 호주제도, 부부 재산 제도상의 남성 우위성, 친권 행사에서의 어머니의 제외, 남자만을 양자로 삼는 문제, 재산 상속에 있어서의 남자 우선주의 등과 함께 동성동본의 혼인 인정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국민 계몽을 위한 강연, 해설 책자 발간, 토론회, 지도자 양성, 가두 캠페인, 대중강좌 개설 등 꾸준한 운동의 결과 5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가족법은 세차레에 걸쳐 개정되어 그나마 민주적인 오늘의 가족법이 되기까지 37년 동안 이태영 박사님은 굴하지 않고 가족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불평등과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여자들을 도와 헌법정신이 민법에서도 지켜질 수 있도록 하였다.
1957년 8월 미국무성 초정으로 미국법을 공부하고 법률 상담소와 가정법원에서 연수를 받는동안 많은것을 보고 느낀 이태영 박사님은 귀국해서는 가정법원의 설치 제안자가 되어 1963년 오늘의 가정법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법률구조 사업에 대한 확신으로 마침내 1986년 법률 구조법 제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안으로 천칠백여 명의 여성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건립한 1976년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1의 866에서 ‘여성백인회관’ 기공식을 갖고, 지상 6층 지하 1층 의 상담소는 다섯 번의 이사를 끝내고 마침내 터를 잡았다.
여성법률상담소의 활동을 계속하며 1963년 이화여대 법대학장에 취임한 그는 71년 사임하기까지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특히 법정 대학에 경영 연구소를 설치,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평생 교육원이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민주회복 국민회의 등에 차명, 반독재투쟁에도 나섰다.
76년 이른바 명동사건으로 불리는 3.1민주구국 선언에 참여하여 남편 정일형 박사는 3년형을 선고받고 자신은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변호사 자격증을 빼앗긴 것 보다 끝없이 멀어지기만 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보며 상심 또한 컸다.
이태영 박사님은 전국 변호사들에게 일년에 한건씩만 무료로 변론해 줄 백예순두명의(162) 변호사단을 만들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80년대 들어 가족법 개정 운동은 질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우선 참여단체가 80개로 늘어나면서 운동의 주체가 확고해졌다. 운동의 방법 또한 시혜를 청원하는 호소의 차원을 넘어 조직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강화됐다. 가정법률 상담소도 회관 입구에 상시적인 서명운동 체제를 갖추었다.
87년에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6.29선언을 받아내기 위한 가두시위에도 나서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태영 박사님 변호사를 일러 “그는 나라일이 어지러워 질때면 잠 못이루고 밤새 몸부림치다 나를 찾아오곤 했다” 회고하기도 했다.
이태영 박사님은 여성해방 운동과 민주화운동 등에 헌신한 공로로 막사이사이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제3회 세계법률구조상, 세계감리교 평화상, 세계를 움직이는 6명의 여성, 유네스코 인권교육상수상을 수상했지만 “장한 어머니상” 상패를 사무실에 소중히 걸어 놓았다. 그 이유는 자녀들이 이 상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뻐했기 때문이란다.
1995년 2월 40여년간 걸어온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소장으로서는 마지막으로 ‘가정상담’을 통해 글을 발표하고 이후 1998년 84살의 나이로 봉원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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