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를 받는 순간여기 미국에 앉아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고 망연해 졌습니다. 달려갈 형편도 되자 않아 가슴만 태우며 선생님이 그처럼 아껴주시던 제자 중의 하나가 이꼴이라니 하고 한탄하다가 적반하장으로 갑자기 가신 선생님을 원망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이 모양이어도 선생님께서는 크게 한 번 혼내시지 않고 그윽하게 웃음 짓기만 하셨지요. 지금은 선생님께 혼이라도 한번 나
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너무 잘 아는 선생님의 크신 인물상을 기리거나 위대하신 업적을 회고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 사랑에 유난하셨던 우리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제자들을 큰 일꾼으로 키우고자 열망하시던 선생님 사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보잘것 없는 저의 모습 때문에 애통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좀더 늘름한 일꾼으로 반듯한 제자가 되어 생전에 선생님께 보람의 기쁨을 안겨 드리지 못한 것이 새삼 한스러워서 울음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인격의 초라함이 이처럼 처절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저의 대학생활은 선생님 때문에 황홀했습니다. 선생님이 이화에 오신 것은 정말로 저희에겐 축복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학장실책상에 앉아 기도하신 후 강의실과 복도를 활력에 넘치는 기운을 불러일으키시며 환하게 하시던 일, 방학 때에도 법학과 학생들이 얼마나 도서관 의자에 눌러 앉아 있는가를 살피시고 개학 후 상을 주시던 일, 철딱서니 없는 우리들을 피나게 공부하도록 수시로 꾸중하시던 일, 여성운동의 필요성과 인간의 존엄 그리고 ‘법의 서민화‘를 열강하시던 일….참으로 저의 대학생활을 풍부하였습니다. 우리들끼리는 가끔 긴장이 풀리면 “선생님께 야단맞고 싶다“라고 말하고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저에게는 선생님이 특별하신 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생의 별화를 처음으로 감지하게 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촌아이 저를 붙잡아 일으키시며 과분한 신뢰와 격려를 주셨습니다.
“그 작고 못생긴 아이 어디 갔니”하시며 수시로 찾아 따뜻한 지도와 보살핌을 주셨습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하며 근근히 대학생활을 영위하던 저에게 큰 장학금을 마련하여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대학 4학년 때에는 ‘한일굴욕외교반대’운동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지명수배와 무기정학을 당한 후 아주대학을 그만두기로 작정한 것을 아시고 친구 차명희를 앞세우고고 제가 도피 중인 곳을 찾아 오셔서 우시면서 복학을 권면하시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선생님 속을 참 많이도 썩혀드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가프치신 인간존엄 ·조국사랑·법의 서민화는 제 삷의 뿌리가 되었고, 저도 누군가 이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소리 없이 관여하며 살고 싶어졌던것을 고백 드립니다. 한때는 우리 선생님 같으신 진정한 애국자 어른이 나라 일을 맡으셨어야 한다는 안타까운 맘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생각하면 한결같이 권세로부터 경원되고 핍박받으시며 고투하신 것이 그리하여 거목 그대로 언제나 어둡고 낮은 곳에 계셨던 평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만 조국의 험난한 시대에 평생을 너무 고생하시고 주무시는 시간조차 아끼시면 휴식 없이 일을 많이 하신 무리에서 선생님의 노년 간강을 잃게 되시지 않았나 생각되어 한스럽습니다.
1972년 성탄에 주시면서 항상 품에 가지고 다니라 하면서 여행 때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가볍고 조그만 성경책이 지금 제 손에 있습니다.
사색하며-생활하며-기도하며-라고 써주신 선생님의 획 굵은 필적이 가만히 살아 움직이며 선생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이 소중한 가르침의 선물이 지금 이순간 더욱 사무치도록 선생님을 그립게 하고 있습니다. |